설교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누리는 인간의 자유 - 이사야서 58:6~1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0-06 15:11
조회
60397
2019년 10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누리는 인간의 자유
본문: 이사야서 58:6~12



말씀을 대할 때 종종 난관에 부딪힙니다.^^ 해석의 여지없이 너무 지당한 말씀을 대할 때입니다. 그저 ‘아멘!’ 하면 그만인데 무슨 말씀을 덧붙일까 난감해집니다.
오늘 본문말씀 또한 그런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로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매우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너무나 자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말씀이 선포된 맥락이 있기에, 그 맥락을 재삼 확인하면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의 선포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와 공동체의 재건을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58:6~12까지만 읽었지만, 사실은 1절부터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1절부터 환기하자면, 본문말씀은 먼저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허물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이 될까요? 마치 그것으로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이 곧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사안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욕망과 의도를 관철시키려 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선포는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로서 금식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금식의 전통은, 주전 586년 유대 민족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부터 그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는 뜻에서 정례화되었습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서 이해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례화된 금식을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 백성들의 태도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행을 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일어나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인 것이 이미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을 내면서 자신들에게 가시적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저 행할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일에도 자신들의 향락만 추구하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는 질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상거래행위를 하고, 채무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킨 현실을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잇속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체 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느냐?” 종교적 의례가 그렇게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가 그렇게 겉치레로만 전락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금식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이 그 답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금식 대신에 인간을 향한 행위로 대체하여 금식의 참뜻, 예배의 참뜻을 강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될까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밑바탕에는 자유가 없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압제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사회가 지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자유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정신을 그 중요한 한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역시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인간사회를 위한 연대의 정신, 정의의 구현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민권이 없는 사람, 파산당한 사람, 노예, 감금된 사람, 굶주린 사람, 떠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이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현실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꼽는다면 어떨까요?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이주민과 난민,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갖가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 아닐까요? 불행하게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열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라고 선포합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권리를 옹호하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렇게 배제 대상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우선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불의하기에 그 불의한 상황을 바로잡으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각 개인의 자유의지 그 자체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고, 그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가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 역시 성서에 그 중요한 한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정의와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그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신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선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재차 선포합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사야의 이 예언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고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그 시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오늘 본문말씀은 국가사회를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그 기초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이 공평한 조건 가운데서 저마다 삶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 과제 가운데 하나가 검찰개혁일 것입니다. 정말 해묵은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뜨겁게 정치적 쟁점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다들 얼마나 실감하였을까요? 주요공직 담임자의 법적ㆍ도덕적 흠결 여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단지 ‘혐의’만으로도 한 가족의 속사정이 속속들이 공개되고 그 인격이 매도당하는 사태 가운데서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의 실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그 권력의 남용으로 고통을 겪을 때 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그 문제를 비로소 깨닫게 된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 것은 시대적 한계의 소산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954년 국회가 처음 형사소송법을 만들던 당시 다수의 경찰이 친일경찰이었다는 점, 경찰의 인권 수준과 자질이 매우 낮았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임시적으로 경찰을 검찰 통제 아래 두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검찰은 독점적인 영장청구권, 기소독점권에 더하여 기소편의주의를 보장받음으로써 무제한의 직접수사권과 총괄적 수사지휘권 등을 휘둘러 사건발생부터 형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사절차를 독점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권력체가 되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제한 허용된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인권을 짓밟으며 헌정질서를 어지럽혀 왔던 대한민국 검찰의 내력입니다.
특정 인사가 법무부장관직을 수행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그 괴물같은 권력체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규율하여 주권자인 국민에게 봉사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 사회에 공평과 정의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성을 보장받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권력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본질적인 핵심입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그 과제 앞에 직면해 있는 우리 사회에 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의 과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개명천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이로부터 비롯되는 우리의 믿음을 신실하게 지켜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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