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하느님과의 대화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7:02
조회
3591
하느님과의 대화


최형묵


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만병통치약 한 가지가 있다. 기도가 그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문제해결 방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기도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학생시절에 그런 경험을 했겠지만, 평소에는 마냥 놀다가도 시험지를 앞에 두는 순간이면 엄숙하게 기도를 한다. 혹은 누군가가 고민거리라도 말하면 "기도해봅시다"라고 곧잘 말한다. 불의한 정치권력에 저항해 몸으로 뛰어드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한다. 이들에게 기도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효용은 조금 다르다. 오늘의 상황을, 이른바 성인이 된 인간이 지배하고 있는 세속화의 시대라고 보고 있는 사람들은 웬지 인간의 나약함을 강조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태도를 강조하는 기도란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행위가 예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 신앙인의 외적 표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행하기는 하되, 그 행위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기도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강조한다. 앞의 경우에 기도가 만병통치약이라면 이들에게 기도란 그저 마지못해 먹는 감기약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떠한 것도 기도에 관한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무작정 하느님께 떼를 쓰는 것도 기도가 아니요, 또한 기도는 단지 의식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며, 더불어 사는 인간들 사이에서 참된 신앙인으로서 모습을 갖추기 위한 중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2.

사람들은 여러 가지 표현방식으로 기도에 관해 말한다. 그 가운데서 다음 두 가지 표현은 기도의 성격 내지는 본질을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하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말이다. 어떠한 입장에서든 이 두 표현은 기도에 관해 말할 때 즐겨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러한 표현이 상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말들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기도의 본질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지만, 호흡이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순간도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체가 호흡을 의식하면서 한다거나 혹은 특별한 기간이나 형식을 정해놓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고 호흡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 할 때, 기도 역시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기도는 바로 우리 영혼이 죽지 않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먹을 시간도 있어야 하고 일할 시간도 있어야 하고 쉴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그 밖에 도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어떻게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도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는 일 년에 사십일 이상 기도원에서 보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순간 기도하여야 한다는 조건에는 부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며, 따라서 한 순간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말의 진의가 그와는 다른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의 진의는 삶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형태만을 기도로 여기고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일상적 삶 자체가 기도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라고 정해 놓고 행할 때 갖추는 신실함과 정성을 매순간의 일상적 삶에서도 구현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기도라고 하게 되면, 특정한 형태의 기도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육체적 호흡은 매순간 같은 간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쉴 대의 호흡이 다르고 일할 때의 호흡이 다르며 긴박한 상태의 호흡이 다르다. 특별히 몸의 건강을 위하여 특별한 요법으로 심호흡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숨이 막혔을 때는 인공호흡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영혼의 호흡 또한 마찬가지이다. 삶 자체가 기도이지만,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혹은 절박한 상황에 부딪혀서는 특별한 형태의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예배에서 드리는 기도나 또 나아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가 이러한 형태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은 기도의 한 성격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의 외적 특성을 나타내주는 말이라면,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말은 기도의 내적 특성 곧 본질적 특성을 나타내준다. 대화라는 말이 갖는 특성은 기도가 단지 혼자만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기도는 일방적인 것일 수 없다. 혼자 말하고 외치는 것은 연설이거나 독백이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그야말로 하느님과 나누는 진지한 대화이다. 나의 뜻을 말하고 하느님의 뜻을 들어 자신이 행해야 할 바를 깨닫는 과정이 바로 기도이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기도행위를 놓고 볼 때, 그것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오애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연원이나 뜻을 말하지만 하느님의 음성은 육성으로 들리는 바 없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의 합리적 사고방식으로는 기도의 응답을 확증할 길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확증받았다고 하는 경험적 실례들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체험이 없는 경우라도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확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특별한 종교적 체험 형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에는 깨달음의 과정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말을 전해받는 당사자의 의중을 묻는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성찰의 과정이 바로 하느님의 응답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확인은 나아가 기도하는 자의 삶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

예수께서 게쎄마니에서 행한 기도는 기도의 이러한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예수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게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곧 이어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첫 번째 기도는 눈앞에 닥친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 예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에수는 그러한 개인적 연원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음으로써 예수는 하느님의 으답이 무엇이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이 예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대화로서 기도가 갖는 본질적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기도란 대화자 상호간, 나와 하느님, 우리와 하느님이 합일되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따. 달리 말해 기돌ㄴ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이며 마침내 서로 하나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나밖에 모르던 주관은 지양되고 참 진리 가운데 하나로 합류된다. 이 합일을 깨닫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기도라 하더라도 그것은 기도가 될 수 없다.


3.

기도의 이러한 성격은 기도의 내용을 결정해준다.

이 말은 모든 기도가 기도문 형태로 주어진 것처럼 천편이률적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자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 또한 기도하는 자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 기도의 내용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응답받을 수 있는 내용의 기도는 한 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기도이다. 비록 지극히 사사로운 용꾸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된 기도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묻는 과정으로상승되어간다면 그 기도는 하느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미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하느님께 하느님께 드려 마땅한 기도 내용으로 확정되어 전수되어 온 기도문이라 하더라도, 또는 당대의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모두가 공히 하느님께 드려야 할 기도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기도하는 당사자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한채 그저 앵무새가 지저귀듯 읊어진 것이라면 그 기도는 하느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결국 나 또는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기도의 내용에서 핵심적인 관건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고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는 경우에 그것이 단지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때가 많다. 자신의 주관성 안에 객관성을 함몰시켜 버리고 만 경우이다. 이것은 정맗말 위험한 것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이기심만을 극대화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 자신의 뜻을 직접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 만한 것들을 보여주셨다. 에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전형은 새삼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우리 인간들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보이셨다. 관계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는 말은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 곧 진리란 단순히 개인들의 의지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의 속담 가운데 '부자 하나가 나오기 위해서는 세 동네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서로 나만 부자가 되겠다고 하면 사는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지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라 해서 공동선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서로 아귀다툼을 할 수밖에 없고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공동선은 '어떻게 하면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 나누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듯은 바로 이러한 관게를 통해서 드러난다.

많은 노예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며 더욱 많은 노예를 갖게 해달라고 하는 백인 노예주의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다 하여 기도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만을 위해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이웃을 돌이켜보고 그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바를 묻는 기도라야 진정한 기도가 될 것이며 하느님께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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