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05·07·26 숨 쉬는 사람, 숨통 트이는 세상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3-04-04 06:00
조회
2693
숨 쉬는 사람, 숨통 트이는 세상


최형묵


1.

"야훼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

"당신께서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 29-30).


창세기 2장의 이 구절은 성서적 인간학의 중요한 전거가 되는 본문입니다. 이 구절은 인간에 관한 두 가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숨을 받아 산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요소는 지난 호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기에 이번에는 두 번째 요소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 합니다. 그런데 숨을 받아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숨이 거두어 들여지면 죽게 되라라는 것입니다. 시편의 본문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성서는, 인간의 몸이 숨을 쉼으로써 산 생명체로서 역할을 하고 숨이 끊어질 때 주검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서적 통찰이라 해서 뭐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닌 듯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평법한 상식에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평범한 상식이, 인간 및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로 간주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숨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자기 표현 방식입니다.

그것은 소위 '생물'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흙도 숨을 위며 바위도 숨을 쉬고 물도 숨을 쉽니다. 만일 흙이 숨을 멈췄다면 이 지구의 생명은 끝장난지 이미 오래였을 겁니다. 흙이 숨쉬고 바위가 숨쉬고 물이 숨쉬기에 천지의 오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자연만이 숨을 쉬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을 모체로 한 인간 사회 역시 숨을 쉽니다. 우리는 '역사의 숨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순한 의인화요 상징이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언어와 뇌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순리의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요컨대 숨이란 모든 사물의 활력과 운동성을 말합니다. 운동하지 않는 사물은 그 사물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연의 자연됨, 인간의 인간됨의 표현이 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유기적 관련성, 곧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신의 운동 기반을 어떤 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만은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대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운동의 한 특성입니다. 숨쉬는 식물은 떡잎만을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성장합니다. 동물도, 사람도, 그리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운동은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바꾸어 나가며 발전적으로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 점에서 운동하는 모든 것은 변화되어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성서가 숨을 말하는 데에는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그 숨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으면 살고 하느님이 숨을 거둬들이면 죽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숨'이 어의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기'(氣)라고도 새겨지는 이 '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하'(ruach)에 해당합니다. 이것의 희랍어 표현은 '프뉴마'(pneuma)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히브리어로 사용될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씁니다만,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희랍세계에는 영육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지배하고 있었고, '프뉴마'(영)는 '사르크스'(육)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래 신약성서가 의도했듯이 단순히 히브리어 '루아하'를 '프뉴마'로 번역한 경우에도 대개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해 파악되기가 일쑤였스빙다. 우리말에서 '영' 혹은 '성령'으로 번역된 말도 대개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육'과 구분되는 어떤 독립적 실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루아하는 이원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활동의 표현방식입니다. 성서에서 실제로 이 '루아하', 그리고 이의 번역어에 해당하는 '프뉴마'는 이 세계와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이 루아하의 주격이 매우 다양하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하느님의 영(일단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영, 예언자의 영, 사람들의 영이 있습니다. 에제키엘 37장에서처럼 아예 주격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루아하의 기능도 매우 다양합니다. 생명의 영, 지혜의 영, 슬기와 경륜의 영, 심판의 영, 재간의 영 등이 있습니다. 루아하 혹은 프뉴마는 이 세계와 역사 가운데 편만해 있는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 외경 지혜서는 "주의 영이 온 세상에 충만하다."(1,7)고 노래하고 있으며 요엘서는 "세상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리리라.(3,1-2)"고 말합니다.

루아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의 선인 서경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되새겨 봄직도 합니다: "기(氣)의 말고 허한 것이 공기에 가득 차 있다. 크게 모인 것은 천지를 이루고 적게 모인 것은 만물이 된다... 기의 맑고 허한 것이 ... 모임이 점점 더하여 넓고 두터운 데 이르러서는 천지도 되고 사람도 된다"(서경덕,『花潭集』卷二鬼神死生論). 기(氣)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자 한 이 통찰은 멀리는 장자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후대로는 조선의 최한기와 최제우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란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시원적 물질이요, 또한 운동하는 그 물질의 특성을 말합니다. 속설에서 흔히 통요되는 음기(陰氣)니 양기(陽氣)니 하는 것도 사실은 운동하는 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문제로 되돌아 가서, 우리에게 걸리는 것은 이 숨이 하느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양태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이 우주만물에 편만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에게 그 기원이 있다면 결국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문제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구의 이원론적 전통 그리고 인격주의적 유일신 전통은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차단하고 말았습니다. 범신론(汎神論)이다, 물활론(物活論)이다, 혹은 혼합주의다 하면 누구도 감히 거기에 근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보고, 지기(至氣) 곧 음양의 기(氣)를 신(神)으로 보았던(최제우,『東經大典』論學文 참조) 동학(東學)의 전통에서 훨씬 심오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운동하는 기를 하느님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비인격적 시원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그리고 세계 자체의 생성 변화 과정과 별도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숨이 인간과 세상 만물에 주어졌다는 것은 고대적 세계관에서의 언표일 뿐, 그 참뜻은 모든 만물의 숨이 하나의 기원을 갖는다는 데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숨은 우주만물을 자신의 몸으으로 하는 하느님의 자기 전개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세계내적 전개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운이 움직일 때 만물은 소생하고 인간의 역사는 변화됩니다. 아니, 만물의 생동과 역사의 변화가 하느님의 기운을 증명합니다.


3.

지금 세상은 숨이 콱! 막혀 있습니다. 서울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숨이 콱 막힙니다. 한강의 기적이다, 뭐다 해서 한구경제의 상징이자 실질적 대표격인 수도 서울은 숨막힌 우리 현실의 본보기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숨막히기 그지 없습니다. 교통도, 정치도, 경제도, 윤리도 막혔습니다. 하느님마저 수십 억의 황금으로 치장한 성전에 가위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쉴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현실(로마 8장)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죽은 자를 일켜 세우는 숨(에제 37장),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숨(루가 4,18), 막힌 담을 허물고 인류가 하나되게 하는 숨(사도 2장)이, 이 숨막히고 기막힌 우리 땅에 몰야쳐야 할 것입니다.*<한국신학연구소 간,『살림』39(199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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