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교회는 안전한 구원의 방주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7:07
조회
4172
{살림} 96.1 원고


교회는 안전한 구원의 방주인가?


최형묵


1.

한 때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대학시절 이야기니까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한 열성적인 전도자로부터 #형제님은 구원받은 날이 언제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전후 사정을 말하자면 이렇다. 교정의 한 벤치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 그 전도자는 $복음전파'를 할 참이었다.그러나 내가 이미 기독교인이고 게다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임을 밝히자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졌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이어 이 물음을 던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전도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고 또 그 나름의 신앙으로 무장해 있던 적이 있어 그 다음에 어떠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리라는 것은 뻔히 예측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 질문을 받게 된 그 즈음에는 그 질문이 정말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열성적 전도자의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형제님은 도대체 구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내던지며 다소간의 설전을 벌인 기억이 있다. 물론 이와 비슷한 경험은 그 이후에도 수차례 더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물음은 거의 '폭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열광적인 집단에서는 $성령세례' 받은 날이 언제인가를 묻기도 한다. 방언하는 것을 유일한 성령체험으로 보고 바로 그 방언경험을 한 날이 언제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더더욱 심한 폭언에 해당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구원이란 무슨 차표 사듯이 어느 한 순간에 확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련의 과정이지 단숨에 완결되는 일이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만, 성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 말은 곧 구원이란 순간적인 결단의 행위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생활화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해서 $구원받은 날이 언제냐?' $성령세례 받은 날이 언제냐?'라고 묻는 것은 신앙을 빙자한 폭언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경우에 대개 그 구원의 표징을 #교인이 되는 것", 곧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예수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가게 되면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사고는 일부 신앙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정한 신앙관이라기보다는, 어찌보면 대다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상식'처럼 통하는 신앙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니 오로지 교회에 나가 그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 유일하게 신실한 신앙인의 도리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교회'는 안전한 $구원의 방주'가 되고 있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안전하게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 신앙인들도 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세상의 환란을 피해 구원을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역시 기나긴 구원의 도상에 있는 존재일 뿐이지 그 자체로 곧바로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길에 이르른 존재로서의 표징과 동시에 세상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허물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2.

교회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다.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는 세상 일반과 구별되는 임무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교회 자체가 보여주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궁극적 형태를 $하나님 나라'로 믿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몸소 보여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본래 교회의 모든 행위는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다. 세례와 말씀선포와 성만찬 등의 성례전,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가 다 하나님 나라를 구체화하기 위한 교회의 행위들이다. 말하자면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동참하기로 결단하며, 말씀을 통해 늘 그 뜻을 새삼 확인하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고 성도들이 하나된다. 이 예전들을 통해 깨닫고 경험한 것이 성도들의 생활 가운데 구체화되며, 그것은 나아가 세상 안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 내적으로 그 질서를 구현함과 동시에 그것을 세상에 실현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교회는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로서, 이를 제대로 수행하는 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별된' 존재로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잘못된 세상의 질서와 영합하고 있을 때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는 것은 분명히 거룩한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한편 교회는 분열된 세상 한 가운데 있는 까닭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특성 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의 공동체이기는 하되, 그것 자체로 곧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은 아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사회적 관계 안에 얽혀 있듯이 교회 공동체도 그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역시 하나의 역사적 사회적 실체라는 이야기다. 바로 이 점이 교회가 안전한 구원의 방주일 수 없게 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의 실체라는 점이 부름받은 이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저버리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면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거꾸로 $구원의 방주' 안에 있는 $성별된 이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격에 대한 강조가 교회로 하여금 자기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성별된 권위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사실상 세상 권력과 영합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급기야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라고 자임하기까지 하였다. 소명의 특권만을 강조했지 허물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온 과오였던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끊임없이 말씀선포를 반복하고 성례전을 되풀이해야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의 신앙은 그것을 통해 양육되고 있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분열되어 있고 우리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까지도 찢겨 있는 현실에서, 바로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이다. 한편으로는 찢긴 개개인의 심령들이 위로를 받고 나아가서는 찢긴 세상을 치유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포를 듣고 결단하며 그것을 자기들의 몸짓으로 구현해보는 과정이 교회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회적 실체로서의 교회는 성별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현실적 근거라 할 수 있다. 찢긴 현실이 없다면 그 찢긴 세상과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부르는 것이 전혀 의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역사적 사회적 실체로서 허물을 지닌 존재, 이것이 교회가 지닌 이중적 성격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옛부터 이 이중적 성격을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여 왔다. 쉽게 말해 현실의 보이는 교회는 약점과 허물이 있을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는 흠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두 교회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점이다.

#세상에 있으되 세상을 벗어난 교회", 이것은 성립불가능한 어떤 도형을 제시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 교회가 교회다워지도록 하는  역동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역동적 긴장이 유지되어야 교회는 자기세계 안에 안주하거나 세상 안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며 증언하려는 공동체로서 나아갈 수 있다.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도상의 존재로서의 교회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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