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김태련 목사의 자손을 찾습니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7-13 09:56
조회
2431
* <주간기독교> 다림줄37번째 원고입니다(130713).


김태련 목사의 자손을 찾습니다.  


아무래도 공개지면을 빌러 이 이야기를 꼭 써야 할 것 같다. 교류관계로 일본을 자주 왕래하다 보니 일본 기독교인들의 여러 활동을 알게 되고 협력해야 할 경우가 많다.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일본사회에서 의미 있는 소수로서 한일간의 과거 역사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및 일본사회의 문제들을 붙잡고 집요하게 활동하는 일본 기독교인들에 대한 깊은 인상을 전한 바 있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난 6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17년간 모금활동을 해온 분들을 서울에서 만났다. 이분들은 6월 12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집회 현장을 찾아 마지막 성금을 전달했다. 원래 그 일은 일본기독교단의 전후보상과 관련된 6개 위원회의 공동사업으로 진행되었던 일이었지만, 교단의 보수화로 관련 위원회들이 폐지된 상황 가운데서도 이분들은 꾸준히 모금활동을 벌여 정대협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 지원활동을 해 왔다. 덕분에 박물관도 건립된 만큼 그 활동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마지막 성금을 전달한 것이다.


7월 8일 그 활동을 마무리하는 좌담회가 일본 오사카에서 있었다. 마침 일본에 체류중이라 그 좌담회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좌담이 끝나고 그분들 가운데 히구치(樋口洋一) 목사가 뭔가 또 새로운 자료를 건넸다. 이분은 일제시대 오사카 지역의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들의 생활과 교회공동체의 역할에 관한 현장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분으로, 당시 오사카 지역의 하루키(春木)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던 김태련 목사의 자손을 찾는 전단이었다. 일전에도 그 이야기를 해와 교회 홈페이지에 그 이야기를 올렸을 뿐 달리 적극적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전단을 만들어왔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일제시대 오사카지역 방직공장에 수많은 조선 여공들이 일을 하였는데, 하루키교회는 그 조선 여공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김태련 목사는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일제말기에 귀국하였다. 그 때 여비도 없이 귀국하는 목사님에게 가난한 여공 신도들은 한 푼의 여비도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일을 너무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현태희(玄泰姬) 할머니가 이제 그 자손들이라도 찾아서 목사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한다는 이야기이다.


전단에 소개된 김태련(金泰鍊) 목사의 약력은 이렇다. 1903년 10월 17일 평양 출생. 1919년 4월 25일 세례. 1935년 5월 25일 목사안수. 코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 졸업. 저술로는 「캘빈의 生涯와 其事業」, 「神道要義」,「宗敎團體法解釋」. 목회지로는 전주중앙교회, 그리고 일본의 다루이(樽井)교회, 하루키(春木)교회, 쥬소(十三)교회, 아와지(淡路)교회. 그리고 자녀로 1남 2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태련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 현태희 할머니는 1920년 제주 출생으로 이미 고령이다. 살아생전 그 자손들과의 해후가 꼭 이뤄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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