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08]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2-08 22:35
조회
1903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2월 8일 / 최형묵 목사


제8강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


1. 일제의 정책변화


3.1민족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그 정책을 바꾼다: 헌병제의 폐지와 보통경찰제 실시, 일반관리의 패검(佩劍) 금지, 한국인 관리임명, 국문신문의 허용 등.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처방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고도의 방법으로 식민통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기독교(또는 종교)에 대한 정책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할 가능성 때문에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기본적으로 일제에 동조하도록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기는 하였으나 교회의 민족주의적 활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감시와 탄압을 계속하였다. 또한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여 성서교육과 한국어 교육을 인정하였으나, 한국어 교육을 기회로 본격적으로 왜곡된 한국역사를 가르치게 함으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하였다. 더욱이 ‘지정학교’ 제도를 실시하여 일정수준에 이른 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인정하여 특혜를 베풀고 나머지 학교를 각종학교 또는 잡종학교로 취급하여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종교교육과 민족교육을 위축시켜나갔다.


2. 사회주의운동과 기독교


1920년대 교회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조선에도 유입된 사회주의운동이 전개되면서 반기독교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이미 1917년에도 이광수와 같은 지식인들로부터 보수화되어 가는 한국교회가 비판에 직면하였는데,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기독교 비판은 본격화되어갔다. 비판의 주 내용: 1)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 2)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독립정신을 말살, 3) 과학사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한다는 이유. 이러한 비판은 1905년 이래 한편으로 지속된 한국교회의 심령부흥운동(당시로서는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주도)을 특별히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여러 입장으로 나타났다: 1)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냉소적 태도(한석원), 2) ‘교회는 무산계급의 앞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있어야 하며 따라서 현대 기독교는 반성해야 한다’는 반성론(신흥우), 3) ‘불만불평한 세계를 부인하고 ... 신세계를 조성코자 함에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서로 같다’는 입장(이대위). 또한 흥미로운 점은 초기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점(평양신학교 출신의 이동휘ㆍ여운형 등).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의 반기독교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보수화를 더욱 강화시킨 면이 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한국 기독교는 반공주의, 반사회주의 경향을 지속하고 있다.


3.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과 기독교인들의 활동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외 활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는데, 면 단위에 이르기까지 연계된 독립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여기에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을 비롯 많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대한애국부인회’ 등 기독교인 여성들을 주축으로 하는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도 간헐적인 테러활동은 지속되었는데, 기독교인이 참여한 대표적인 예는 전도사 출신의 강우규 열사의 의거였다.


4. 국외에서의 독립운동과 기독교인들의 활동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고(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조소앙, 신익희 등), 특별히 상해한인교회는 일제로부터 “예수교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데 그 주의가 있다”고 주목을 받는 상황이었다.

또한 간도지역의 민족독립운동은 뿌리가 깊었는데, 이 지역에서도 국내에서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평화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체험한 후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이 전개된다. 그래서 이 간도지역은 일제 기간 내내 무장독립운동의 요람이 된다. 이곳의 교회들에서는 주일예배가 끝난 후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의 무장독립운동 참여도 적극적이었는데,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표면상 약화 양상을 띠며 일부에서는 경건주의적 비정치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한국의 독립을 원조할 것으로 기대했던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자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달성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이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5. 교회의 문화운동


일제의 문화통치는 비록 기만적이기는 했지만, 외형적으로 상당 부분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공간에서 기독교는 이전부터 지속하여 온 문서활동을 포함한 활발한 문화활동을 전개한다. 기독교 언론의 활성화(예, 일반 시사 보도까지 포함한 교계 언론의 활동), 기독교 잡지 발간의 활성화와 한국인 필자들의 활발한 활동(신학세계, 신학지남, 성서조선, 활천 ... / 이상재, 윤치호, 최병헌, 김교신, 유형기, 최태용, 김창준, 조병옥, 김활란, 남궁혁, 박형룡, 백낙준, 송창근, 김재준, 함석헌... 등장), 사실상 악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인 ‘선교학교’(Misssin School)들의 교육활동, 그리고 학교교육에 대한 대안교육으로서의 주일학교의 활성화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이외의 군소 교단들의 교회도 발전하여 현재의 교파별 교회 구도가 점차 형성되어 갔고, 교파 신학의 맹아 또한 배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해외 한인교회의 형성 및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개시 등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한국교회 역사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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