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사 11] 민족의 분열, 교회의 분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2-29 22:10
조회
1899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2 - 한국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2년 2월 29일 / 최형묵 목사



제11강 민족의 분열, 교회의 분열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남북의 분단으로 민족사의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 교회마저도 분열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1. 교회의 재건


1) 북한에서의 교회재건 운동과 수난

해방이 되자 교회재건 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시작되었다. 이 재건운동은 1948년 9월 20일 20여명의 ‘출옥성도’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여 교회재건 원칙을 발표하는 데서 본격화된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의 70%이상을 점하고 있는 이북 지역에서의 이 운동은 교회 안팎의 도전에 직면한다: 교회를 지킨 자들의 고통 또한 컸으며, 신사참배 회개 문제는 각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이라는 입장과 대립. 결국 재건운동 세력은 독로회 구성 /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정권의 등장, 그리고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결성으로 교회는 갈등하고 대립 / 6.25를 전후로 하여 북한에서의 기독교는 현저히 약화.                  


2) 남한에서의 교회재건 운동

미군의 진주로 북한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처한 남한에서의 기독교 재건운동은 1945년 9월 8일 장ㆍ감 중심으로 연합교단 존속 방안을 논의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퇴장에 이어 성결교, 구세군, 침례교 등이 각각 재건 회의를 열어 제 갈 길을 갔다.


* 당시 남북에서 공히 새로운 국가의 수립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내분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2. 교회의 분열


남한에서 재건파는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근본주의 입장에 철저한 메첸 선교사 추종세력 중심으로 신학교육을 실시하려 하자 경남노회의 비재건파가 반발하고 결국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한 신학교로 결의함으로써 ‘고신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됨(1951년 5월 24일 ‘경남법통노회’ 조직) - ‘경건’.

교회재건 운동과 신학교 문제가 복합된 당시 남한의 교회 상황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는 조선신학교 문제였다. 해방직후 남한에서 유일한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의 신학사상이 보수주의에 도전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급기야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제33회 총회에 “우리가 幼時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며 김재준 교수의 “근대주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고등비판을 거부”한다는 진정서를 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총회는 김재준 목사에게 자중하도록 하였고 조선신학교개혁안을 구상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해 1948년 5월 장로회신학교의 개교를 결정하고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내정. 결국 총회 스스로 이율배반의 모순을 범하여 한 총회 산하의 두 학교 처리를 놓고 전쟁의 와중에서 논란을 벌이게 되고 끝내 김재준 목사를 출교하고 조선신학교를 부정함으로써, 1953년 불가불 새로운 교단 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게 된다. * 당시 불법적 결의에 맞선 1953년 호헌총회 선언: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우리는 전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 ‘신학’

6.25 전쟁으로 외부적으로 겪은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내부적 분열의 외길을 걷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경건’과 ‘신학’을 명분으로 하는 분열뿐만 아니라 교회는 ‘교권’ 문제(인사와 정치 문제)로 ‘명분없는’ 분열양상을 겪기도 하였다(1955년 3월 감리교의 분열).


* 한국교회의 참회 문제: 1945년 10월 독일의 <쉬투트가르트선언> / 1967년 3월 <제2차세계대전하에 있어서의 일본 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 /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 200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      

              

3. 일탈된 신앙운동  


6.25와 그 후유증에 시달린 교회에 열광적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운동들은 대개 탈사회적, 일탈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박태선의 전도관 / 문선명의 통일교 / 나운몽의 용문산 부흥회 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천차만별의 기도원 부흥운동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일종의 정신착란 증상 같은 현상이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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