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서 14] 나그네가 되어라(41~44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10-10 21:50
조회
1101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2년 10월 10일 / 최형묵 목사


제14강 나그네가 되어라(41~44절)



4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것이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작은 것도 빼앗길 것입니다.”

4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43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을 듣고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유대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사랑하면서 그 열매를 싫어하든가, 열매를 사랑하면서 그 나무는 싫어합니다.”

4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아들을 모독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에 실린 본문


41. (* 유사병행구: 마태 13:12, 마가 4:24~24, 누가 8:18//마태 25:25:29, 누가 19:26)

*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다른 복음서들에도 등장하는 유사병행구는 심각한 논란꺼리. 그것이 만일 일상의 물질적 삶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면 공평을 부정하는 것(‘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점에서 문제. 더욱이 달란트의 비유(마태) 또는 므나의 비유(누가)와 같이 돈놀이와 결부되었을 때 그것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음. 그래서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은 현실의 실상을 비유로 삼아 어떤 교훈을 일깨우는 것인지 현실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인지 논란의 대상이 됨. 그러나 어떤 정황에 대한 묘사 없이 그저 ‘말씀’으로 등장하는 도마복음서의 이 구절은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의 여지없이 곧바로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음. 도마복음서의 일관된 맥락에서 볼 때 깨달음이 갖는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연속성의 부재. 곧 질적인 단절. 겉으로 보기에 깨달음의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시 말해 더 많이 깨닫고 더 적게 깨달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 차원에서 근본적 차이(유무)가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씀. 점화되어 곧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이내 사그라드는 불꽃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어줍잖은 성찰, 깨달음으로 자만에 빠지지 말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정진을 촉구하는 말씀. 과거역사에 대한 어줍잖은 반성과 사과의 경우를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42.

* 나그네가 되어라: 도마복음의 가장 짧은 구절이자 동시에 도마복음에만 나오는 구절로 도마복음의 성격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구절이라 할 수 있음. 하지만 사실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요 특히 성서에서 일관되는 가르침. 도상의 존재로서 인간. 방랑의 카리스마들로서 예수운동에 동참한 이들의 실제 모습이기도 함.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집착을 삶의 절대적인 안정의 근거로 삼는 세상의 삶의 법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뜻함. ‘탈앙가주망’(김용옥). ‘탈향(脫向)’(안병무).

* 인도 무굴제국의 황제 아크바르가 세운 파테푸르 시크리 모스크 아치의 명문: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은 하나의 다리일 뿐, 건너가거라. 거기에 네 거처를 짓지는 말아라.”


43.

* 당신은 누구십니까?: 역시 도마복음서에만 나오는 구절.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예수의 정체와 관련된 물음의 상황이 등장하기는 함. 그런데 다른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정체 내지는 권위에 관한 물음이 제기될 경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예수’를 강조함(요 8:19, 8:25~26, 14:8~11).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외적 권위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곧바로 스스로의 말로 그 정체를 깨달아 알도록 촉구하면서, 그러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고 통탄함. 제자들이 마치 유대인들과 같다고 했는데, 이 때 ‘유대인과 같다’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면서 열매를 싫어하거나 나무를 싫어하면서 열매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것. 그것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두고 하는 말. 말로써 곧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렇다고 했을 때, 예수와 그 제자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정통 유대인과는 구별되는 ‘갈릴리사람들’로서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듯.  


44. (* 유사병행구: 마태 12:31~32, 마가 3:28~29, 누가 12:10)

* 용서받지 못할 성령에 대한 모독: 다른 복음서들에도 유사병행구가 등장하지만 참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 더욱이 다른 복음서에는 딱 떨어지게 삼위의 격이 모두 등장하지 않은 반면, 도마복음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딱 떨어지게 등장하고 있어 이해하기가 더 어려움. 이 구절을 보면 도마복음이 ‘삼위일체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에도 지적한 바와 같이 도마복음이 ‘삼위일체론’을 전제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떨어지게 삼위의 격이 등장하고, 그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이 자체가 삼위일체론을 전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함. 삼위일체론은 삼위가 동등한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요체로 함.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동등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음.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은 대상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 그 대상화는 오해와 곡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음. 반면에 성령은 대상화가 불가능한 내면의 진실과 통하는 차원으로 그야말로 영적 차원을 말함. 성령에 대한 모독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실에 대한 기만을 뜻함. 그러니까 실제로 자신의 눈앞에 대상화되어 있는 존재(아들) 또는 머리속으로 대상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존재(근본적으로 대상화 가능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이미지로 그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곡해는 있을 수 있지만(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그럴 수 있다 쳐도),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진실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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