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서 26] 여우도 굴이 있지만(86~89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3-27 21:53
조회
1446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3월 27일 / 최형묵 목사


제26강 여우도 굴이 있지만(86~89절)


8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은 누워서 쉴 곳이 없습니다.”

8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의존하는 몸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 둘에 의존하는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합니까?”

8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들[천사들]과 예언자들이 와서 여러분의 것을 돌려 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스스로 말합니다. ‘그들이 언제 와서 그들의 것을 가지고 갈 것인가.’ 하고.”

8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잔의 바깥을 씻습니까? 안을 만드신 이가 바깥도 만드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오강남, <또 다른 예수>에 실린 본문(김용옥, <도마복음 한글 역주 3> 참조)


86. (* 유사병행구: 마태 8:20; 누가 9:58)

* 인간의 조건: 먼저 이 구절에서 사용된 ‘사람’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음. 정확하게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를 말함. 이 개념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으로, 대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쓰이는 개념. 그래서 종말론적 맥락에서 메시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음. 그러나 이 말은 특정한 호칭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가 최근에는 우세함. 본문 번역에서도 ‘예수’를 지칭하는 의미로서보다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 그렇다면 일단 본문의 표면적 의미는 분명해짐. 여우나 새는 안주할 곳이 있지만 사람은 안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함. 여우나 새 등 금수(禽獸)는 이 세상의 것 이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을 따르기에 이 세상 자체 안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에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본문의 문맥상 그 의미는 축복이라고 봐야 할 것. 고단한 삶에 대한 탄식이라기보다는, 그러기에 인간이라는 의미.


87.

* 몸에 의지하는 몸의 비참함: 여기서 몸은 일차적으로 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아가 더 포괄적으로 물질적 삶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또한 몸 그 자체로서 몸은 다른 몸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몸일 수도 있음. 다른 몸이라면 육식의 비극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예수 일행이 채식을 했다는 증거는 없고, 그렇게 보면 의미가 너무 협소해짐. 육체적인 삶, 나아가 물질적인 삶에만 매여 있는 몸의 비참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그렇게 보면 앞 구절과도 상통. 전반적으로 이 구절은 물질적인 삶에만 의존하는 자기에 매여 있을 때 그 영혼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함. ‘몸’의 현실에 갇힌 ‘영혼’. 진정한 주체의 부재 상황. 자기 삶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외부의 조건과 시선에 매여 사는 삶의 비참함을 말함. 도마복음은 죽은 것을 먹을지라도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는 경지(11절)를 추구함.


88.

* 천사들 및 예언자들과 주고받는 것: 상당히 난해한 구절. 도대체 무얼 주고받는다는 것일까? 우선 당시 방랑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무리들의 행태를 생각하면, 앞 구절은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법보시(法布施)를 하면 이를 받은 사람들은 재보시(財布施)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음(오강남). 특별한 사람들이 뭔가를 주었는데, 그것은 이미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들로서, 도마복음의 일관된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내면의 빛을 일깨운 것을 볼 수 있음. 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그에 고마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음을 하게 해 준 사람에게 준다는 것.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재물인지 아니면 뭔가 내면의 어떤 것인지는 더 깊이 헤아려봐야 할 것. 여기까지는 아직 어렴풋하지만 대략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음. 그러나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가져가야 할 그들 자신의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파악하기 쉽지 않음. 먼저 준 것이 재물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떨쳐버려야 할 그 어떤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가야 한다(오강남)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거꾸로 처음에는 천사들과 예언자들의 도움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던 이들이 오히려 천사들과 예언자들로 간주되는 이들을 깨우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김용옥)일까? 이 본문은 후자의 해석이 더 그럴 듯. 높은 경지에 있는 이들이 깨우침을 줬는데, 거꾸로 그렇게 해서 깨우침을 얻은 이들이 다시 높은 경지에 있던 이들을 다시 깨우치게 하는 상황. 천사와 예언자들보다 못했던 도반들이 천사들과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서는 상황. 동일한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상승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이 말씀의 깊은 뜻에 가까울 것으로 보임.


89. (* 유사병행구: 마태 23:25~26; 누가 11:39~41)

* 잔의 안과 밖: 다른 복음서에도 유사 병행구가 등장하고 있고, 그 의미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음. 유대교의 정결예법에 따른 외면적 정결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정결을 말하는 구절. 그러나 외면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추구하는 말씀.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로서 행위.        


* 다음 제27강(4/3) 주제는 “나의 멍에와 나의 짐”(90~9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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