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희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 고린도전서 7:29~31[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0-14 13:11
조회
61
2018년 10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궁극적 희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본문: 고린도전서 7:29~31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일상의 삶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종말론적 기대가 무엇일까요? 궁극적 희망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 기필코 궁극적으로 이뤄지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믿음의 맥락에서 읽을 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함께 나눴지요? 결혼 문제와 음식물 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된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는 본문말씀(디전 4:1~5)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결혼에 대한 태도에서 본래 바울의 입장과 디모데전서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에는 그 결혼에 관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또한 사실은 바로 그 언급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환기해볼까요?
“아내에게 매였으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새로 맞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결혼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처녀가 결혼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림살이로 몸이 고달플 것이므로, 내가 아껴서 하는 말입니다.”(7:27~28)
사실 고린도전서 7장은 그 전체가 결혼과 독신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7장 첫머리에서부터 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결혼관계에 관한 어떤 규범을 율법주의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에 권고할 만한 어떤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입장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믿음을 따른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현재의 세계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강화할 수도 있는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거리를 둘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현재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그런 뜻을 함축합니다.
아내에게 매여 있으면 벗어날 필요가 없고, 이미 벗어나 있으면 새로 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결혼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이 하등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그야말로 궁극적 희망이 실현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 문제로 골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종말론적 믿음의 빛 안에서 그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권면한 다음,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오늘 본문말씀으로 부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권면의 취지를 이 대목에서 다시 일반적인 권면 형태로 바꾸어 그 의미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마치 아닌 듯’ 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있는 데도 없는 듯, 하는 데도 안 하는 듯 살라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언뜻 떠올리기에 이 말씀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마음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불교적 명상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같은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는 스토아 철학적 의미에서 마음의 평정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것에 대해 마음으로 초연해지라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의미일까요? 이 말씀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단지 관조적으로 마음 자세만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종말론적 희망 또는 메시아적 희망으로서 성격을 지니지 못합니다. 단지 부당한 현실을 옹호해 줄 뿐입니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해탈만 추구한다면 현실은 변함없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으로 남을 뿐입니다.
예컨대, 일제 말기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들에게는 종종 선불교의 명상의식으로 마음을 평정하고 출격에 임하도록 권장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 마음의 평정은, 스스로 느끼는 평화와는 정반대로 자신을 극한적인 폭력의 무기로 돌변시키고 나아가 불의한 전쟁을 정당화시킵니다.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는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똑 같은 상황을 유념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전혀 달리 말하기도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인간의 고통과 기쁨의 상황을 그냥 그렇게 지나칠 수 없다는 것, 그냥 그렇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타인의 고통과 기쁨으로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 진정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 가르침과는 모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의 문제, 마음의 평정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구분과 조건들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라는 데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현실의 조건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의 조건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절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조건을 타개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모순의 상황, 갈등의 상황 안에 있지만, 그 상황을 야기하는 조건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본문말씀에서 세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업을 포함하여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현실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현재의 그것에 매이지 말라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의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명성, 지금 내가 의존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나 자신을 대신하거나 우리의 궁극적 희망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자체가 덧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의 형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의 사회적 관계, 현재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끊임없이 지금 우리의 조건을 상대화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희망 가운데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가 탄생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독특성은 바로 이 믿음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종영되었지요? 많은 화제를 낳은 드라마였습니다.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노비 또는 천민으로서 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 살아생전에 해보지 못했던 말을 저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리 오너라!” 양반들이 아랫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귀하가 사는 조선에는 노비는 살 수 있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는 거요?” 그 물음 또한 드라마에서 계속 환기되었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의 장벽을 환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그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뿐 현존하는 사회 안에서의 신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참뜻을 그렇게 빗대어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의 참뜻을 실감나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그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삶의 평화를 누리는 것,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오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어떤 면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실과 조건을 이용할지언정 그 현실과 조건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매여야 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그 희망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 앞서 말합니다.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7:22~23)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믿음은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이든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갈망하는 믿음, 그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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