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종교의 한계지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 로마서 7:14~2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1-03 19:54
조회
8283
2018년 10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종교의 한계지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본문: 로마서 7:14~25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격문을 발표했던 시점과 가장 가까운 주일로, 올해는 50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비단 루터에게서만 비롯된 사건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수많은 선구자들이 있었고, 루터는 그 선구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을 향한 루터의 95개조 격문을 종교개혁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유럽사회 안에서 종교개혁이 확산되어가는 데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주인공 루터의 사상이 이전 시대를 돌파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을까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원리였습니다.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복음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대 원칙이었습니다. 루터가 그 원리를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준 원천이 바로 사도 바울의 서신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로마서는 결정적인 그 전거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는, 다른 서신서들이 그때그때마다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씌어진 것과 달리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집대성한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가 아직 가보지 못한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취지로 쓴 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라고 해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서신과 비교할 때 자신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정리한 성격을 띠게 된 것입니다.

그 핵심 요체가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리가 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원리입니다. 그 요체는 비단 루터에게만 영감을 주었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마다 많은 신학사상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큰 영향력을 지닌 까닭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뜻하는 것과 맞닿아 있고,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 일요학당 시간에 바울 신학의 요체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모든 업적과 자격 요건을 부정함으로써 현실에서 권리 없는 자들에게도 마땅히 삶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점에서 자격 요건을 판가름하는 율법은 무용해집니다. 바울은 전체의 대강에서 그 입장을 일관되게 강조하였고, 수 없이 강조하였습니다.

율법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족쇄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산인 신약성서 안에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에게 비롯된 것입니다. 도마복음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할례가 쓸 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례가 유익했다면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에서 이미 할례받은 아이들을 출산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받는 참된 할례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도마복음 53)

여기서 할례는 율법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 무용성을 말함으로써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그에 따른 선민의식을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좀 복잡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의 무용성을 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유용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순되는 듯한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율법의 근본정신에서는 유용함을 말하지만 규범화된 율법이 사람을 속박하는 측면에서는 무용함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괜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인간 삶의 정황, 인간 삶의 실존을 깊이 헤아린 데서 비롯됩니다. 현학적인 논리를 펼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그 의미를 이야기하려다 보니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그 사정을 충분히 감안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로마서 7장 본문은 그 이중성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본문입니다.

 

사실 바울이 율법을 문제 삼은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태도를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사실상 자기 의를 내세우는 태도를 문제삼은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율법을 숭상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하나의 표본일 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에게도, 나아가서는 당시의 로마세계 자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의로움을 가장한 오늘의 세계에도 해당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볼 것 같으면, 그래서 바울은 먼저 율법의 무용성을 말합니다(1~6절).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아는 사람’, 곧 율법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종교를 아는 사람, 종교의 세계에 속한 사람, 나아가서는 인간적 노력에 최고의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그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든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르는 태도는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기점은 뭘까요? 그 기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문자’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조문과 규칙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곧바로 이어 율법의 유용성을 말합니다(7-20절). 필요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부연을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 거기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냐 하면 결코 그렇게 단정해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 율법이 유용하지만 왜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인지 분명히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제한된 유용성을 말함으로써 낡은 정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규명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할 뿐이라고 합니다. 내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는 한에서 율법은 유용합니다. 쉽게 말해, 율법은 옳으냐 그르냐를 판별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일반적인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종교적 가르침은 이렇게 사는 것이 옳고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킵니다. 이렇게 옳고 그른 것을 끊임없이 판별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 자체가 옳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현실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율법에 비춰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지만, 율법에 비추어보고 나서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았다’(8절)는 바울의 고백은 그와 같은 이치를 말합니다. 현실이 옳지 않은 상황에서 옳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가르침은 적극적 의미를 지닙니다.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것(12절)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고 해서 스스로 절대적으로 옳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의 조문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절대적으로 옳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합니다. 율법을 아는 많은 사람은 율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옳음을 스스로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바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길입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늘 그렇게 남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세속의 가치들도 그런 식으로 종교화됩니다. ‘이것이 옳으니 저것은 잘못되었다!’는 식의 자기정당화의 논리만이 신성화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는 오히려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 분별할수록 자신은 옳지 않다는 사실만을 더 깊게 확인할 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첫 대목에서, ‘육정에 매인 존재로 죄 아래 팔린 몸’(14절)이라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무슨 흉악한 범죄자이거나 시정잡배와 같은 사람이 아닌, 비범한 사도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느낍니다. 율법은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기 때문입니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절감합니다. 바울의 ‘놀라운 고백’이라고 말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조금만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율법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합니다. 바꿔 말하면 유용성과 무용성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율법은 그 죄를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참조: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갈 3:24)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무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탄식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표준새번역)//“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개역) 비단 사도 바울만의 탄식일까요?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우리들 모두가 절감하는 탄식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되었을까요? 탄식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오히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극적인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을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열정적으로 설파하고 있던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처한 공통의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통찰한 사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그 나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그 나락에 있다는 것만을 절감할 뿐입니다. 마음속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법이 있지만, 자신의 몸 가운데 또 다른 죄의 법이 있어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을 다시 탄식하며, 사도 바울은 새로운 진실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한계를 깨닫고 탄식했을 때, 그 탄식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 한계에 대한 탄식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 형식과 계율,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의 한계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상식적 수준에서 볼 때 바울은 무슨 흉악한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락에 처해 있는 상황을 두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지닌 한계 상황에 대한 탄식을 뜻합니다.

바울의 이 탄식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뜻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길로 안내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통찰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봐도 한참 모자라는 짓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종교인들에게 바울의 이 탄식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바울의 이 탄식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현실, 특히 교회의 현실을 보면 그저 아득해질 따름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이 나락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발견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음 가운데 자리한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은 사실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을 뿐,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이 가능한지는 아직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의 비참한 바울 스스로의 상황,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인간의 상황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이야기일까요? 그 답은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8장에 나옵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첫 대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소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을 따를 수 있게 해 줬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법, 곧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시고 인도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 곧 성령의 법에 맞서 그것을 가로막는, 육신을 지배하는 법이 뭘까요?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법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여 있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법을 따르게 해줬다는 것은 그 장애물을 제거해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직접 대면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 또한 그렇게 자녀로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노예로 삼는 영이 아니라 자녀로 삼는 영입니다. 그 성령은 아파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곁의 자매형제, 나아가 이 모든 피조세계의 아픔을 느끼게 해 주는 영입니다. 이 생명 세계가 하나임을 알게 해주고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영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영의 법을 일깨우고 그것을 따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란, 우리의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힘의 인도를 받는 것을 뜻하는데, 도대체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로마서 8장은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것, 그 증거로 우리들 스스로가 사랑을 실현하는 것, 바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말합니다.

그 진실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섬기라 하고, 다른 어떤 형식과 계율을 마치 본령으로 여기는 종교적 생활양식, 삶의 양식은 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기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안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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