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하나님 - 출애굽기 32:1~6[황의명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8-11-18 17:34
조회
88
2018년 11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만들어진 하나님
본문: 출애굽기 32:1~6
황의명 목사



한 믿음 좋은 흑인 성도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있었다.
옆 동네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서 예배를 한 번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백인교회라서 흑인은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흑인 성도는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결국 이 흑인 성도를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기도는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왜요, 하나님 제가 흑인이라서요?”
“아니, 나도 거기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

그 백인 교회는 자신들은 교회라고 하지만 실상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게 내려오자 아론에게 찾아와서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합니다.
무슨 하나님이 장난감도 아니고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만들어내라고 했을까요?
사실 모세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어야 하는데 출애굽 하면서도 엄청 힘들었습니다.
출애굽하기까지 엄청난 노역도 해야 했습니다.
짜잔 하고 그냥 출애굽 시켜 주면 좋은데 무슨 열재앙이나 하고 또 심장떨리게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의 대군이 쫓아오기도 했습니다.

출애굽 내내 가슴 졸여야했고,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모세가 내려오지도 않겠다. 이 참에 자기들을 편하게 해줄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만들어낸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의 원리를 담고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투자한 만큼 가치를 내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금부치를 가져다 바칩니다.
사람들이 귀한 금부치를 하나님을 만들기 위해 바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투자해야 그만큼 많이 주실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투자한 만큼 벌어드립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하나님은 출애굽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합니다.
너무 쉬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이 없고 자신들이 드린 것이 없으니까 이렇게 고생하나보다!
뭐하나 풍성한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거대한 대 제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도 아니고, 뭐 대단한 명성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광야에 있고, 여전히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었다는 것을요. 그들에게 지금 결핍된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도 매일같이 공급받고 있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나 더위로 부터도 안전하고, 가는 곳마다 바위에서 샘물이 솟기도 하면서 부족함 없이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더 가지고 싶어 하고 쌓아놓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니까 자기들의 금부치를 투자해서라도 더 많이 가지게 해 줄 수 있는 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아론은 사람들의 금부치를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공포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은 뭔지 아십니까? 사람이 만들어낸 형상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 갇혀서 사람이 임의대로 만든 형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든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십계명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창조물로 변질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만들 수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 형상은 우리가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경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상이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쾌락의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놓고는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먹고 마시며 뛰어 놉니다.
그것은 그 당시 가나안에서 벌어졌던 우상제사의 형식과도 동일했습니다.
자신들의 쾌락을 즐기기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쾌락을 최대화 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웃의 아픔이나 어려움, 슬픔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나만 즐겁고 행복하고 편하고 안락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나만 춤추고 마시면서 흥청망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 쾌락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쾌락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인간사에 최소한으로 개입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원리와 성경적 이념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 살만하고 고통받는 자가 없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공의롭고 정의로우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한 지침을 성경을 통해 주시고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쾌락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내가 좀더 쾌락을 누리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고 예배드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세력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재물을 탐하는 세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재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노력했습니다.
재물에 있어서도 공동체적 삶을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재물을 모두 모아서 함께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숨겼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재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재물이 천국을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하나님께 쌓아놓으면 하나님을 섬기지만 재물을 내 광에 쌓아놓으면 내 광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렴해야 하고 재물에 있어서 소유욕이 아니라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재물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소유의 개념이 아닌 나눔의 개념이 있어야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재물을 부어서 나누게 하십니다.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찬양중에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이라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상하다 동전 한 잎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하네!”

여러분 하나님의 재물원리는 소유가 아닌 나눔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풍성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이는 것을 강조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은 성과주의입니다.
성과주의의 가장 큰 현상이 스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자격증, 경력 등 눈에 보이는 것들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잠재된 능력이나 가능성은 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이 아닌 이미 쌓아온 수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스펙, 기능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기능으로 판단하셨다면 애굽을 택하셨을 것이고, 골리앗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약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시고 세상에서 보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들어서 있는 자들,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하찮은 유목민의 종교였지만 지금은 전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증거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얽매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것들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이미 고착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착화 되었다는 것은 변화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상에 얽매이지 않으시기에 모든 사람의 삶속에 들어가실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상황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가슴으로 삶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역사하시는 동사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거나 우리가 그리는 형상에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마음을 열고 그저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는 대로 우리를 맡겨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쾌락을 강조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쾌락은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나의 심미적인 쾌감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쾌락주의와의 싸움은 가나안 전쟁이었습니다.
가나안 종교는 쾌락의 종교였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하고, 온통 심미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쾌락의 절정이 거룩한 제사의 자리에서 벌어졌습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성적인 행위들이 벌어지고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유한 자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부로 자신들의 쾌락을 즐기는 사이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하고 수발 들어야 하고 그들의 성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집안의 처녀들이 창녀가 되어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강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이 그랬고, 가나안이 그랬고, 로마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우리나라가 그랬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그러한 타락한 나라들로의 침투의 역사입니다.
기독교의 선교를 통해 불의가 타파되고 반상의 차별이 타파되고 쾌락주의자들이 타파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 자신의 쾌락이나 욕심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인 십계명의 돌판으로 산산조각 나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인도하실 뿐 우리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 없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시며 승리하시는 살림교회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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