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이름, 자유를 향한 희망 - 출애굽기 3:1~15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2-03 14:11
조회
40253
2019년 2월 3일(일) 오전 11시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이름, 자유를 향한 희망
본문: 출애굽기 3:1~15



오늘 본문말씀은 모세의 소명체험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생애에서 극적인 한 국면을 전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성서의 근본 뜻을 또한 극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극적인 계기를 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모세와 출애굽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한 민족의 위대한 영웅과 그 백성에 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실존에 관한 매우 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 전반적인 문맥을 환기해보겠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로서 40년을 살다가 히브리인의 아들로서 자각한 후 모세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고 양치는 목자로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광야의 일상에 묻혀 산지 40년이었습니다. 광야의 삶이란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작렬하는 태양 아래, 있는 둥 마는 둥 보이는 둥 마는 둥 하는 가냘픈 풀포기들을 찾아다니며 양을 먹이는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소식이 쉽사리 전해지는 것도 아니요 다른 곳으로 소식을 전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곳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적 삶의 연속입니다.
그런 일상에 파묻혀 있던 모세가 어느 날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떨기 가운데 이는 불꽃을 발견합니다. 불꽃은 타오르는데 떨기가 타지 않는 기이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일상의 무덤덤한 적막을 깨트리는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모세는 눈이 번쩍 뜨였을 것입니다. 모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 겨우 밝혔을 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명을 내립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라.”
그 순간부터 모세의 삶은 달라집니다.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에서 히브리인의 아들로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모세, 그러다가 일상에 파묻힌 목자 모세는 이제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히브리인의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서 변모를 합니다. 모세의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그 사건은 분명히 극적이었습니다.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녀린 떨기나무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도 타지 않는 현상은 도저히 일상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태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의 사건만 주목하고 기억하기 쉽습니다. 바로 그 특별한 계시의 순간이 있었기에 모세는 일상의 삶을 떨치고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 나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 기적을 체험하기 이전에 이미 강렬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저 일상에 파묻힌 목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게 목자로 살아가는 모세의 가슴속에는 이미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를 갖고 있었습니다.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그대로 그 말을 뜻하는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가 안주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강렬한 자의식의 표현입니다. 목자로서 살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일상에 묻혀 살면 먹고사는 일 걱정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눌러앉아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를 둘러싼 현실에 그렇게 이의를 제기했고 그렇게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 자의식이 당장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성서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출애 2:23)고 전합니다. 지금 있는 그 처지에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 없는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자의식에 불꽃이 튀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전반부의 장면입니다. 모세가 목격한 불꽃은 사실은 모세의 자의식의 불꽃이었습니다. 떨기나무와 같이 연약한 히브리 동포들, 그 연약한 떨기나무와 같이 무력해져 있는 자신에게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발하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오, 그렇게 빛나야 할 히브리 동포들에 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스스로 저버리지 않았던 사람에게 다가온 깨달음이요 초월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순간 무력해져 있던 자기를 뛰어넘어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 모세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만의 특별한 경험일까요?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순간 급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서의 모든 소명 기사가 전하는 바와 같이, 모세는 여전히 주저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혼자 힘만으로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진정한 고백입니다. 자신이 무얼 믿고 감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묻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겠습니까?”
그렇게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그제서야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들이며, 또 묻습니다. ‘나를 일러 백성을 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그 백성들 앞에서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명으로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 백성들이 ‘도대체 어떤 신이 너를 보냈느냐?’고 물을 터인데, 거기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은 너희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 바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정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일깨워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말씀은 수없이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없이 많은 논란이 이 본문을 둘러싸고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새번역 성서에 번역되어 있는 14절 말씀은, 개역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되어 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나는 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어학적으로 하나님께서 고유한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아흐예 아쉘 이흐예’로 읽힙니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발음과 ‘아흐예’ ‘이흐예’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발음이 히브리어 모음자가 없던 시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발음이라면, 모음자 없이 기록된 네 글자는 ‘야훼’로 발음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이로부터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해명만으로는 이 말씀의 뜻이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 각별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이름이 지니는 뜻 때문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든 외부적인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게다가 이 표현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해 ‘나는 그렇게 되고자 할 그대로가 나다.’라고 미래형으로 혹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되, 지금 당장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계명도 사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 이해와 관련됩니다. 성서는 형상을 만드는 것과 그것에 대한 숭배의 금지를 수없이 되풀이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 신의 형상을 두지 않고 ‘말씀’을 두었던 것도 그러한 신앙, 그러한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그 정신을 사실상 망각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형상, 신의 형상을 붙잡고 싶어 했고, 결국은 보이는 것, 손에 쥘 수 있는 것에 집착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다’, 그 말씀은 그 어떤 것이든 외부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성격을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될 나이다’, 이것은 현재 확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첫 머리에 나오는 말입니다. “도를 도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바로 그 말과 상통하는 뜻을 지닌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뭐라고 규정하거나 어떻게 떠받들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을 뒤집어 씌어 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가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착각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등장하는 맥락 한 가운데서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히브리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이 주어지는 맥락에서 이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모세의 정체성, 나아가서는 히브리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곧 ‘나를 나 되게 하지 못하는 힘’을 떨치고 ‘스스로 서는 삶’,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백성에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말하라는 것은, 이제 너희들도 ‘이집트인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민 히브리인’으로 서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미래로 열린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이루어질 희망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말하기를,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그러나 종교가 있는 곳에 꼭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종교의 기원, 그리고 오늘의 종교적 현실을 동시에 돌아보게 해주는 경구입니다.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 이름은 모세와 그 백성이 처한 삶의 현실과 동시에 종교적 현실을 돌아보게 해 줍니다. 거대한 권력으로 형상화한 이집트의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며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되지 않는 야훼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 계시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진정한 희망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나를 나 되게 하는 길로 당당히 나설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역할을 합니까?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당당한 삶으로 인도해줍니까? 아니면 그 어떤 강박상태에 매이게 만듭니까? 만일 나의 삶을 향유하지 못한 채 그 어떤 것에 매여 끊임없이 허덕인다면,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을 갖고 있는지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현재의 조건에 묶어 두는 모든 것들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그 기쁨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당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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