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덫에 걸린 어리석은 사람들 - 고린도후서 4:7~12; 시편 31:9~13[이정희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9-04-14 14:14
조회
160
2019년 4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덫에 걸린 어리석은 사람들
본문: 고린도후서 4:7~12; 시편 31:9~13
이정희 목사



역사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인 잔인한 4월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학살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 참살사건, 1960년 419혁명, 2014년 416세월호 참변 등. 오늘 한국 정치사회, 경제적 현실은 한마디로 ‘도고일척(道高一尺) 마고일장(魔高一丈)’ 바름이 30센티 자라려 하면 악이 3미터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삿된 것[邪]이 옳은 것[正]을 욱여싸고 파묻기 위해 온갖 술수와 방책을, 조직-제도적, 물질적, 정신심리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이 잔인한 4월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기쁨과 평화의 영은 과연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악령의 시대’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숨 쉬게 해준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살아 있을까요?

아니, 달리 우회하지 않고 물어보겠습니다. 에수님의 삶은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길 끝자락에서 걸어야 했던 길은 ‘비아 돌로로자’ 십자가를 지고 걷는 고난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 역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사랑의 길이라면 마땅히 기쁨과 평화의 길이어야 할 터인데,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의 삶의 길로서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 아닐까요?
깊이 되짚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논쟁, 다툼, 갈등, 음모, 모의가 끈질기게 일어납니다. 왜? 누군가의 무엇을 건들기 때문입니다. 전통, 관습, 규례, 율법, 제도 등을 건들기 때문입니다. 울타리, 경계를 건듭니다. 경계란 다름 아니라 배제, 차단, 훈육, 억압, 복종, 고수, 차별, 자배, 수탈의 선입니다.
엊그제 4월 11일 66년 만에 낙태죄 헌법 불합치판정을 내렸습니다. 문제는 생명권일터인데, 그 권리의 법적 규정을 넘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총체적인 삶의 판을 어떻게 일구느냐일 것입니다. 아무튼 생명권을 다르게 읽어낸 사람들이 견고한 울타리를 끈질기게 헤친 결과일 것입니다. 저출산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보장되는 총체적인 삶의 마당이 열려 있지 않는 상황에서, 국지적으로 돈을 퍼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삶의 길은 삶의 ‘기쁨’과 ‘평화’를 제어하는 모든 경계선들을 가차없이 치열하게 건드는, 뒤집고 뚫는, 허무는 걸음으로 새롭게 열리는 길이었습니다. ‘기쁨’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고 숨으로 생명이 된 인간의 잠재적 역량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이란 두 사람의 사랑으로 각각이 그 생명 역량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그 반대겠지요. ‘평화’란 그 본디 禾 +口의 平, 균형이지요. 균형은 오직 나눔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독일어 ‘평화Friede’는 유사한 낱말들인 ‘자유로운frei’ ‘구혼하다freien’ ‘친구Freund’처럼 인도게르만어 어근 ‘pri-’(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기원합니다. 영어 ‘peace’의 근본인 라틴어 ‘pax’는 궁극의 상태, 화해,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을 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우주적 질서의 원칙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하나됨’의 의미는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전체주의적 폭력의 그림자가 언제나 그것을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에 오직 하나 뿐인 단독자, 독특한 것들이 서로를 비추고 공명하며 이루어내는 화엄의 세계, 인드라망, 그것이 바로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사랑, 기쁨, 평화는 엉켜 있는 보로메오의 고리입니다. 생명권과 낙태를 적어도 ‘죄’라는 윤리/도덕적 법률적 경계에서 성찰할 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사유의 망치는 바로 이 사랑, 기쁨, 평화라는 보로메오의 고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바로 이 삶의 길을 함께 걷는 ‘동무’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요한 15:15 너희는 더 이상 종(dou/loj)이 아니라 ‘동무’(fi,louj)”)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예수의 사랑의 덫에 걸린 겁니다. 철학자 김영민은 ‘동무’를 ‘같은 것[同]’이 ‘없는[無]’ 관계로 읽으면서, 그 동무란 임계와 경계와 한계를 걷는 삶과 더불어 위험한, 서늘한 관계라고, “그러므로, 동무를 사귀는 일은 그 위험한, 없는, 미래적인 존재양식에 나를 견주며 겹치는 일이며, 그래서 나를 (즉, 내 관계를) 재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계속적인 과정”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는 것이 동무라 합니다.(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216-217)
동무하자고, 어깨동무하고 함께 길을 걷는 도반(道伴)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수님, 그 사랑의 초대에서 우리는 생명을 길을 알아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의 길을 걷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고,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2고린 4:7-12)

이 어리석은 사랑의 길, 생명의 길, 기쁨과 평화의 길이 평탄대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은 관념적인, 수도자적 고행의 길이 아니라 험난한 역사적 고통의 길임을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묻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의 역사는 언제 끝날까요? 끝날 수 있을까요? 아니, 이 고난주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고난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마조히스트적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누구냐구요? 모르시겠어요? 요즘 깔끔한 얼굴을 치켜들고 말같지 앟은 말을 말이라고 떠벌리고, 그 떠벌림에 아멘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아멘하면 그 폭력적 광기의 힘이 마치 자신의 힘이 되는 냥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적 아편쟁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아 돌로로사, 그 고난의 길은 2천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위세가 꺾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2500년전 한 시인의 시편 31편의 절규가 1944년 한 목사의 탄식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저처럼 가난하고 비천했으며, 옥에 갇히고 동무들에게까지도 버림받았습니다.
당신은 인간들의 모든 비통함을 아십니다. 제 안에, 제 고독 안에 당신이 계십니다.
그 누구도 제 편이 되지 않을 때, 저와 함께 해 주시고 저를 잊지 말고 찾아주소서.
당신은 제가 당신을 알고 당신께로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따르오니, 도우소서.“(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270, 1943 11 23-25?)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 비아 돌로로사, 고난의 길을 어떻게 새로운 삶, 생명의 길로, 기쁨과 평화의 길로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본회퍼는 우리에게 이렇게 그 길을 일구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연장된 세계의 일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여기서 모든 인간 존재의 회심이 주어진다는 경험은 오직 예수가 ‘타자를 위해 현존한다’는 사실에서만 가능하다. 예수의 ‘타자를 위한 현존재’는 초월경험이다. 오직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죽기까지 ‘타자를 위한 존재’의 범주 내에서만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 그리고 [파당적, 편파적, 민중적] 편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신앙은 이러한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최강의, 최선의 본질이 아니고 -- 그것은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 --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타자를 위한 존재’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삶이다. 초월적인 것은 무한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도달 가능한 이웃이다.”(<<저항과 복종>>, 710-711)

“그 흔한 사랑 한번 못해본 사람”이라고 누군가 노래했지만,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이웃사랑은 새로운 삶, 생명 살림을 자신의 존재의 터전으로 삼는, 예수의 동무로 초대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하는 어리석은 길입니다. 힘든 그 길을 우리가 그럼에도 걷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는 예수의 생명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확신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어리석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더욱더 약동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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