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능한 이들을 위한 메시아는 어디에? - 마태복음 25:14-30[정용택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9-06-02 19:26
조회
1495
2019년 6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능한 이들을 위한 메시아는 어디에?
본문: 마태복음 25:14-30
정용택 목사



14. “또 하늘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15.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결산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2.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3.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4.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아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이 엄한(난폭한)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25.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6.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쓸모없는) 게으른(두려워하는/주저하는)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 27. 니 말대로라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28. ‘여봐라. 이놈에게서 당장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저 친구에게 주어라.’ 29.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 ‘그리고 이 쓸모없는 종놈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 달란트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오늘 살펴볼 본문은 흔히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라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우리가 읽었다시피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 멀리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그 종들과 재정을 결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종은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를 벌었고, 두 번째 종은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를 벌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그 돈을 그냥 묵혀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칭찬과 상급을 받고, 세 번째 종은 책망과 징벌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달란트’로 상징되는,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개인적 은사와 능력을 성실하게 계발하라 권고하면서, 만일 그렇지 못하면 가혹한 심판이 내려질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교회 강단에서 널리 해석되어 왔습니다. 영어의 ‘탤런트’(talent)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 그것을 잘 계발해서 발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어떤 차이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 부합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1)

물론 신학자들은 그보다는 좀 더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 본문을 해석해왔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비유는 종말론적 맥락에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이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각자의 삶에 합당한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떠나 계셨던 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이를테면 하느님나라를 확장하는 운동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급이 주어지는 기준은 그들이 수행한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걸맞게 성과를 낸 이들에겐 구원의 상급이 돌아가겠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불성실한 신앙인들에게는 가혹한 심판이 내려집니다. 이 비유를 포함하여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일련의 비유들(25:1-13 열 처녀 비유; 25:14-30 달란트 비유; 25:31-46 최후심판의 비유)이 24장부터 시작되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긴 가르침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맥상으로 이 비유는 인자의 돌아옴과 더불어 일어날 종말론적 심판과 메시아 잔치에 입각한 해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느님나라의 확장이건 교회의 양적 성장이건 맡겨진 사명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즉 달란트를 증식시키지 못하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를 경고하면서 종말론적 심판에 대비하여 제자도를 실천한 것을 권고하는 본문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덕분에 행위심판 교리에 관한 최적의 증거 본문으로 제시되어 왔고요.

2. 전통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최근의 전복적인 해석들

그런데 최근 들어,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땅에 묻은 종의 말(24-25절)과 이에 대한 주인의 반응(26-30절) 속에서 주인의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지배자의 언행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해석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이 비유 속의 주인의 행동은 지배적인 문화와 제국의 가치를 흉내 내는 폭군적 방식으로서, 예수의 이전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인줄 알고”라고 종이 주인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나, 주인이 그 말을 되받아서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앞의 말이 종의 주인에 대한 진술이었고, 뒤의 말이 주인이 그러한 자신에 대한 종의 판단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이러한 묘사가 실제로 주인의 모습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주인의 성격은 “이자놀이를 통해 다른 이들을 착취하면서까지 부당한 이윤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악한 자본가의 형상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예수의 성격에 입각해서 본다면, 주인이 틀렸고 종이 맞는 것이 됩니다. 종은 주인의 그런 평소 모습에 반감을 가졌던 것이고, 일부러 그래서 주인의 이윤창출 명령, 즉 장사나 이자놀이를 해서 이윤을 창출하라는 명령에 저항했던 것이지요. 마태는 당시 지배적인 로마의 폭력적인 착취경제에 이미 물들어 버렸지만, 우리는 여기서 오히려 세 번째 종의 입장에 서서 마태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전복적인 해석들은 종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사악하다(종의 말대로 하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고 보고 있으며, 나아가 그런 사악한 주인에 대해 다른 종들과 달리 게으름, 즉 태업(怠業)을 했기 때문에 세 번째 종이야말로 상대적으로 옳은 인물이라는 판단을 공유합니다. 특히 전통적인 해석과 달리 최근의 전복적인 해석에서 비유의 전달자인 예수는 비유 속의 인물들 중 주인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받는 세 번째 종과 입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점이 중요합니다. 현대 비유 연구에선 예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왕이나 주인과 같은 권력자를 예수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기존의 암묵적인 전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학자들마다 이 비유를 편집하고 자신의 텍스트 안에 조성한 마태 혹은 마태공동체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선 해석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종=예수=하나님의 뜻이므로 독자들도 그 편에 서야 한다는 점을 대체로 강조합니다.

3. 제3의 진보적인 해석

한편 이와 같은 최근의 전복적인 해석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비유의 전달자인 예수를 비유 속에 등장하는 권위 있는 인물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비유 해석의 기조를 고수함으로써 이 비유 전후 문맥의 예수의 비유 및 가르침들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를 전통적인 해석과 전복적 해석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제3의 진보적 해석이라 부르고 싶은데요.2)

일단 이 해석에서는 종이 주인에 대해 생각한 것, 즉 주인은 “엄한(난폭한)” 사람으로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로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합니다. 주인에 대한 종의 묘사와 그 묘사에 대한 주인의 재인용에서 주인이 과연 그런 평가를 긍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정하고 있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것이 종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주인이 자신에 대한 종의 그런 평가를 수긍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의 말을 되받아서 하고 있는 말 역시 가정법이지, 직설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덧붙여 주인이 정말로 이익에 눈이 먼 탐욕적인 사람이라면,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에 대해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굉장히 공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처럼, 달란트 비유의 주인 역시 결과와 관계없이 동일한 보상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욱이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선 나중에 온 이들과 같은 보상을 받은 것에 대해 먼저 온 종들이 문제제기를 했는데, ‘달란트 비유’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인이 그만큼 공정하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제3의 해석에서는 달란트를 돈에 대한 실제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과 같은 하늘나라의 확장과 관련된 제자도의 은유로 이해합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 배후의 마태공동체는 ‘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해선 외부인과 내부인의 구별을 받아들였고, 내부인 가운데서도 그 비밀을 더욱 소유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등 관계를 인정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이런 구별짓기를 통해서 유대교 공동체로부터 폭력적으로 축출된 자신들의 상처받은 정체성을 옹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분리와 참여를 거듭하고, 자신의 소명과 종말론적 운명이 다가오는 시간 속에 예수의 제자로서 한계적(liminal)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주요 특징으로 삼았”3)던 자발적인 주변부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우한 사회적 상황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더욱 더 하느님나라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현실에서 그들이 치루고 있는 대가는 처참했지만,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한 그들의 헌신과 충성은 언젠가 인자가 돌아오시면 보상될 것이라 기대되었습니다. 자신들을 박해하고 축출했던 다른 공동체들, 이를테면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그대로 묵혀 둔 이들에 비해 마태공동체가 옳았다는 것은 훗날 그들이 받게 될 구원과 상급을 통해 입증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식의 공동체 외부인과 내부인의 엄격한 구별짓기, 내부인 안에서도 성과에 따른 차등적인 보상 기대를 강하게 내면화함으로써 마태공동체는 구별된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고 공동체의 통합과 결속 역시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제3의 진보적 해석에서,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인물로 판정받게 됩니다. 그의 문제점은 주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볼 때, 세 번째 종이 주인에 대해 그릇된 선입견을 갖고 괜히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제자도를 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심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특히 한글성경에서 종에 대해 주인이 묘사하는 진술 가운데서 ‘악한’으로 번역된 포네로스(πονηρός)와 ‘게으른’으로 번역된 오크네로스(ὀκνηρός)가 각각 ‘쓸모없는’과 ‘주저하는’(또는 ‘두려워하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그 세 번째 종이 악한 눈으로 주인을 오해하고 비판하며 저항해서 그렇지, 하늘나라는 본래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이들이 칭찬받는 나라가 아니며, 달란트를 늘리는 것은 결국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지식’을 널리 알리고 확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 세 번째 종이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하늘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종으로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판정받아 종말에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펼쳐지는 천국 잔치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4. 역량을 중심으로 다시 접근하기

사실 여기서부터는 성서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서학적 해석이 완료되고,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윤리적 쟁점에 관한 논쟁입니다. 저는 가장 성공적인 해석이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실천적 난점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마태공동체의 정의론(正義論)을 우리의 맥락으로 그대로 가져왔을 때, 이런 정의론이 우리 시대에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다시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본문에 나오는 한 단어가 계속 걸리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그 단어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와 상당히 유사한 내용 담고 있는 누가복음 19장 11-28절의 일명 ‘므나 비유’와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므나 비유에선 주인이 열 명의 종들에게 각각 똑같이 한 므나씩 나누어 주었지만, 달란트 비유에서는 차등 지급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차등 지급이 이루어졌나요? 네. 그렇습니다. 15절에 나오지요. “주인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다르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바로 ‘능력’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쓰인 ‘능력’은 성서원어(헬라어)로 ‘뒤나미스’(δύναμις)입니다. 저 유명한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에서 권능으로 번역된 단어 역시 ‘뒤나미스’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뒤나미스는 대체로 힘, 권세, 권력, 세력, 그리고 성력의 권능을 뜻하지만, 오늘 달란트 비유처럼 개인의 능력, 재능, 역량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성서에서는 드물게 발견되지만(고전 14:11, ‘소리의 뜻’)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글에서는 ‘뜻’,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인 “달란트 비유에서 뒤나미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한글 성경들에서는 15절의 뒤나미스를 어떻게 표기하고 있을까요? 먼저 오래된 개역한글과 개역개정판에서는 ‘재능’으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표준새번역과 새번역판에서는 ‘능력’으로, 가톨릭에서 주로 사용하는 공동번역 및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역시 ‘능력’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를 ‘역량’, 즉 ‘capability’로 번역하고자 합니다. 사회과학적 용례에서, 능력 및 재능과 역량은 엄밀히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일반적으로 능력(ability, capacity)이나 재능(talent)은 보통 한 개인의 내적인 특성, 즉 성격적인 특징과 타고난 지성이나 감성, 건강상태와 내면화한 학습, 인지 및 동작 기능을 뜻합니다. 그야말로 선천적인 능력으로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역량은 후천적으로 훈련되거나 계발된 특성과 능력으로서 대부분 정치적‧사회적‧경제적‧가족적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길러지는 사회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처럼 잘 학습되고 훈련된 기술에서 나오는 문서위조 능력이나 과외수업 능력, 절박함과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뛰어난 연기능력 같은 특성이 그들의 기본적인 역량인 것입니다. 능력이나 재능이 환경과 조건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한 내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역량은 사회적으로 계발된 개인의 후천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 자신이 가진 내적인 능력이 적절히 기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나라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문직에 종사했던 소위 말하는 엘리트였지만, 국내의 정치적 혼란이나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조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들어온 난민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법적 권리가 없는 난민이기에 그는 한국의 정치 문제에 참여할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내적인 능력이 적절하게 기능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의 능력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량은 한없이 부족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맡겨만 준다면 목표로 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난민의 신분이기 때문에 한국에선 자신이 바라는 것을 확보할 역량이 한없이 부족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난민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일까요? 특정한 분야의 뛰어난 재능과 소질을 타고 났지만 열악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그런 재능을 계발할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좌절한 이들, 혹은 운 좋게 의무 교육과정을 통해서 상당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에 많으며, 어쩌면 우리 교회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내적인 능력과 외적인 역량은 서로 중첩되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별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적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정작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때, 그의 역량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이렇듯 역량이란 “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과 같습니다. 그래서 역량은 일종의 자유, 즉 선택 가능한 기능의 조합을 달성하는 자유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개인들이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추구할 자유이기도 합니다. 부유한 사람이 단식 또는 금식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하는 사람들처럼 식사와 영양에서 기능적으로 동일한 성취를 할 수 있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서 전혀 다른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단식 또는 금식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굶는 사람은 결코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잘 먹는 것 역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4) 단식하는 이에게 단식은 선택이지만, 굶는 사람에게 굶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입니다. 이러한 역량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달란트 비유로 돌아가 보지요.

역량에 초점을 맞춰서 보자면, 이 비유는 결국 역량이 가장 부족했던 사람이 종말에 가서도 여전히 발전이 지체된 상태이고, 애초부터 역량이 풍부했던 이들이 그 능력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로 요약됩니다. 출발선상에서부터 존재한 차별적인 조건 그대로, 잘난 사람이 더 잘 나게 되고, 못난 사람은 무능하고 게을러서 여전히 못난 상태로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해석(과 마찬가지로 제3의 진보적인 해석)에선 이러한 상황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예수님은 역량이 부족한 사람을 편들기는커녕 그를 책망하고, 오히려 애초부터 달란트가 많았던 이들,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이 풍부했던 이들이 성과를 낸 것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왔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이 말하는 하늘나라의 원리와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 돈을 땅에 묻어 두고 아무 이익도 올리지 못한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더 벌어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고,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원리에 더 부합하는 것 아닐까요? 예수가 굳이 그렇게 애초부터 가진 것이 적은 이를 비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 본문은 무엇인가가 왜곡된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러운 해석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5)

앞서 저는 달란트 비유 연구사에 새롭게 등장한 제3의 진보적 해석에선 세 번째 종이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판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그래서 ‘쓸모없는’ 인물로 판정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세 번째 종의 특성을 묘사하는 데 쓰인 포네로스(ponēros)와 오크네로스(oknēros)라는 단어가 그 종의 내적인 특성, 혹은 고유한 성격을 시사하는 ‘악하고 게으른’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그의 행동의 한계를 암시하는 ‘주저하여’(혹은 ‘두려워하여’) 것으로, 그렇게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에 주인의 입장에선 ‘쓸모없는’ 종으로 간주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후자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세 번째 종이 단순히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열악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가족적 환경 속에서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뜻, 곧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재산을 더욱 늘려 놓으라는 명령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지적인 능력이나 감수성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뜻을 알아차릴만한 내적인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 있었던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해석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가 주인의 뜻을 실행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그가 주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주인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나 환경 가운데 오랫동안 놓여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세 번째 종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달란트를 준 주인의 뜻을 헤아려서 다른 종들처럼 재산을 최대한 증식시키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세 번째 종이 주인 앞에서 처음 했던 말, 24절의 “주인님, 나는, 주인이 엄한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에서 우리는 그가 주인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선 종들이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두 배로 늘려서 왔을 때 주인이 그들을 모두 칭찬해준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종들의 노력으로부터 나오는 이득을 처음부터 기대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세 번째 종의 주인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면, 주인은 앞선 종들이 재산을 불렸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그렇게 칭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26-27절에서 보듯이 주인이 종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면서 했던 말,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니 말대로라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가 설령 주인의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종의 잘못된 선입견을 주인이 반어적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종의 평가를 주인이 인정하건 말건 종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러한 평가가 종의 순전한 오해, 혹은 주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주인에 대한 종의 그러한 오해를 온전히 종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주인은 종에게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과 책임을 다했을까요? 한 달란트를 두 달란트로 못 만들어낸 그 세 번째 종에게 주인이 난폭한 이로 기억되는 것이 종만의 잘못일까요? 왜 그렇게 종이 주인을 평가했는지를, 종의 입장에서 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번째 종 역시 처음에는 다른 종들처럼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늘려서 주인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가진 역량이 다른 종들에 비해서 부족하다는 것, 즉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의 폭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그는 어쩌면 달란트를 증식시키는 일을 주인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물러섰을지도 모릅니다.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포기하는 법을 익힌 그는 차라리 이 돈을 그대로 잘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괜히 돈을 더 벌려고 투자를 했다가 받은 달란트마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득을 남기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받은 달란트를 자본금 삼아 사업을 벌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놀이하는 이들이 과연 자신의 돈을 안전하게 맡아줄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던 그의 입장에서는 감히 넘봐서는 안 되는 일을 섣불리 감행하기보다 그냥 포기하고 돈을 잘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세 번째 종을 쓸모없다고 책망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람의 역량의 차이, 즉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각자가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서, 획일적인 척도로 개개인의 성과를 판단하고 보상과 처벌을 내리고 있는 그런 주인을 우리는 비유의 전달자인 예수님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달란트를 몇 개나 받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 개를 받았든 한 개를 받았든 그 각각의 달란트를 다양한 삶으로 변환시키는 데는 다양한 조건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연령, 젠더, 장애, 질병성향등과 관련하여 이질적인 신체적 특징을 보이며 그에 따라 필요사항 또한 매우 다릅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소득이 그 사람이 살아가기에 얼마나 충분한지도 그가 살아가는 지리적 조건, 물리적 환경, 정치적 상황,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6) 이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정도, 혹은 이미 계발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가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서, 또한 개인에 주어져 있는 기회와 실질적 자유의 한계들을 문제시하지 않고서, 능력을 단일한 수치의 척도로 환원하는 것도 모자라 그 단일한 능력에 따라서 성과를 판단하는 그런 식의 정의론이 과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느님나라의 정의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정말로 그런 정의론이 성서가 말하는 정의이고, 그런 정의를 선포하는 이가 우리의 메시아라면 저는 그런 성서도 그런 메시아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달란트 비유에서 난폭한 주인은 예수님과 절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이야기의 전체적인 해석은 철저하게 주인의 관점이 아닌 세 번째 종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컨대 달란트 비유는 역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나아가 역량을 확대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상식화된 세계관 일체를 전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다시 말해, 주인으로 대변되는 상식적 정의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무능한 자, 역량이 부족하여 권력으로부터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하느님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을 요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의 근본적인 다양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각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회와 실질적 자유를 증진함으로써 모든 이들의 역량과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나가라는 예수님의 준엄한 요구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 관해 처음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이래로, 저의 귓가엔 지금도 여전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쓸모없는 이들, 무능한 이들, 자신의 역량을 실현한 자유를 제약당하고 있는 이들의 한 맺힌 절규가 맴돌고 있습니다. 대체 이 쓸모없는 이들을 위한 메시아는 어디에 있냐는… 우리를 구원할 예수는 정녕 있는 것이냐는… 그 외침을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천안살림교회가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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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로마의 은화 단위인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학자들은 그 금액의 비현실성 때문에 여기서 달란트를 다른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나 알레고리로 간주합니다.
2) 김학철, 「하늘나라 비유로서 달란트 비유 다시 읽기」, 『마태복음 해석』, 대한기독교서회, 2014, 261-285 참조.
3) 같은 저자, 「마태공동체 연구사」, 위의 책, 206.
4) 마사 누스바움, 『역량의 창조』, 한상연 옮김, 돌베개, 2015, 35-6.
5)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한국신학연구소, 1997, 361-375 참조.
6) 아마르티아 센, 『정의의 아이디어』, 이규원 옮김, 지식의날개, 2019, 2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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