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함으로 이루는 믿음 - 야고보서 2:14~2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0-20 21:52
조회
139
2019년 10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행함으로 이루는 믿음
본문: 야고보서 2:14~26



오늘 본문말씀은 성서 자체를 통해서 보거나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보거나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의 진의를 별 어려움 없이 곧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 그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독특한 위치를 갖게 된 것은, 실제로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은연중 ‘믿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것인 냥 지나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찍이 김재준 목사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자면, ‘신앙생활’은 하고 있는데 ‘생활신앙’을 구현하지 못한 격이라 할 것입니다.

믿음 자체를 강조하는 이러한 경향은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특별한 행위의 체계인 율법에 대항해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직 유대 민족이라는 특수한 민족적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복음을 보편적인 가치로 전환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당시 율법을 행하는 것의 핵심은 할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을 행함으로써, 곧 할례를 행함으로써 선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저항한 것은 바로 그러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대항해 복음을, 그리고 행위에 대항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상관없이 복음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 것도 모두 바울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비롯된 믿음을 통한 보편적 구원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가운데서 결정적 기회마다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박해시대 잘못된 행위로 혼탁해진 교회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준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의한 구원관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박해시대 변절했던 성직자의 성사가 과연 유효한가 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었을 때,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처받은 지체들을 치유하고 포용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오직 성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기치를 내세운 루터의 종교개혁 또한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루터가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항해 95개조 격문을 발표했던 10월 31일과 가장 가까운 주일로, 종교개혁주일에 해당합니다. 루터는, 교황무오설을 바탕으로 교황으로 대변되는 교회의 전통에 따른 진리 판단을 거부하고 오직 성서에 입각해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원리를 세웠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와 결합하여 꽉 짜여진 사회질서 가운데서 특별한 결단이 없이도 그저 교회생활에 충실하고 성례전의 행위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의 은사를 누릴 수 있다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루터의 구원관 역시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재해석한 결과입니다.
또한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받들고 있던 국가교회에 대항해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라고 외쳤던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도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백교회의 핵심 지도자로서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신앙과 신학, 인간의 자기만족적인 욕망을 끝까지 경계하고 권력과 불의에 대항했던 칼 바르트의 신학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의 원리를 재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원에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보자면 믿음에 의한 구원의 원리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해 온 셈입니다. 오만에 빠진 인간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가 되어 온 셈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원리가 꼭 그렇게 적극적인 역할을 맡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속물화라고 할까요?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원리는, 본회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값싼 은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값싼 은총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 경우는 멀리 가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기적적인 교회부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교회 신앙생활의 밑바탕이 무엇일까요? 역시 ‘믿음으로써 거저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 아닙니까?
믿음만 최고의 척도로 여길 뿐 삶과 행위의 차원은 부차화시켜버린 신앙생활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신앙은 좋다지만^^ 윤리적 감각은 무딘 괴상한 신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독교인 인구가 많아도 사회 전반의 도덕적 감각이 변화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교회가 소수일 때는 오히려 사회 전반의 인권의식과 도덕의식을 이끄는 데 기여했지만, 지금 과연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반대로 세속의 시민사회는 높은 도덕의식과 인권의식을 갖추고 선도하는 데 반하여, 교회는 뒷걸음치고 있는 것이 실상입니다.
신앙과 행위, 믿음과 삶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 따로 삶 따로! 그저 내면의 세계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위로의 조건이 될 뿐, 삶의 차원에서는 믿음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결과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동의 차원을 잃어버린 신앙, 삶의 차원을 잃어 버린 믿음은 결국 이 사회에 희망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잘못된 세상에 영합하는 결과만을 빚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이미 초기 교회 안에서 오용되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니까, 그에 맞서 ‘행함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야고보의 의도였을까요? 그렇게 오해된 적도 있습니다. 사실은 루터도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에 비유한 것을 보면 그렇게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바울이 가르쳤던 믿음에 의한 구원의 원리와 지금 야고보가 역설하고 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그렇게 상반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한 바울의 주장은 결코 행동의 차원, 삶의 차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유대인의 독특한 행위 체계로서 복음의 빛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율법을 거부한 것이지, 믿음이 삶의 차원을 배제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갈라 5:6)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바울은 역설하였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말씀은, 그 진실이 왜곡되어 신앙이 역동성을 상실하고, 그저 유폐된 개인의 내면에 갇혀버린 현실에서 본래 신앙의 역동성을 회복하고자 한 뜻을 지닌 것입니다.

행위로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업적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주장이 함축하는 진의와 통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가난한 이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삶을 함께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차별을 금지하는 말씀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 그 문맥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비인간화하는 현실에 대항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모든 생명을 존엄히 여기는 행동, 그 삶으로 우리의 믿음이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쓸데없이 말의 표현 그 자체에 매이거나 교묘한 말장난에 매여 혼란에 빠지지 않고, 말의 본래 뜻을 깊이 새긴다면 신앙의 진실을 이해하는 데 그렇게 어려움에 빠질 까닭이 없습니다. 뭐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어째 바울과 야고보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를까요? 어리둥절해 할 까닭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는 표면상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주장의 진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삶의 차원, 행위의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는 오늘 본문말씀은, 한편으로는 한국 기독교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을 새삼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삶의 차원, 행동의 차원을 망각해 왔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분명히 이 사회를 계몽하고 깨우치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병원을 세우고 자선기관을 세우며 학교를 세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돕고 국민을 계몽하였으며, 나아가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쟁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던 자랑스러운 전통도 지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통일을 향한 대열에서도 교회는 헌신함으로써 이 사회를 선도하고자 애를 써 온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도 ‘믿음’이 독선을 낳고 도덕적 불감증을 낳았으며 현실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무지몽매함을 유도하지는 않았는지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반성을 통해 잃어버린 삶의 차원, 행동의 차원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바르고 건강한 삶의 전형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맹목적인 순종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경우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며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복음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아집을 따르며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인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구원과 생명의 길이 아니라 욕망과 아집을 보장해 주는 명예롭지 못한 후견인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잘못된 믿음이 만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식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상식을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정에서, 사람과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꿈과 희망에서, 그리고 사소한 인간관계의 신뢰감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분노와 항거에서, 나아가 무엇보다 믿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데서 더 앞서가며 더 헌신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가 지키는, 10월 셋째 주일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 진정한 삶의 희망을 바라보고 그 희망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된 것, 그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생동하는 믿음으로, 우리가 믿는 바대로 살아감으로 그 안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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