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파국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삶의 희망 - 창세기 8:18~22; 9:12~17[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1-03 15:40
조회
104
2019년 11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파국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삶의 희망
본문: 창세기 8:18~22; 9:12~17



본문말씀은 유명한 노아 홍수 이야기의 종결 부분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대목과, 그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8장과 9장의 본문을 다 읽어야 하지만, 성서일과에 제시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한 대목만 끊어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롭지만, 그 본문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포함하여 그 전반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환기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창세기의 전반부는 타락과 구원의 희망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계속 되풀이합니다. 태초에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인간의 잘못으로 세상이 완전히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멸하시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늘 동행하던 노아에게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줍니다.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 노아의 존재는 파국 가운데서도 소멸하지 않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홍수를 일으켜 땅의 모든 존재를 소멸시킬 작정이므로 그 홍수를 피할 수 있도록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노아가 채비를 다 마치고 난 후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홍수로 땅이 뒤덮입니다. 뿐만 아니라 땅 속에서 물이 터져 차오르기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가 검증 가능한 역사적 사실일까요? 역사적으로 전 세계가 홍수로 뒤덮인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성서의 배경과 관련해 말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지적인 홍수와 해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집트 나일 강의 범람도 그 한 배경일 수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의 신화에는 노아 홍수 이야기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이야기가 있고, 이집트 신화에도 그 단서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지역의 신화나 설화에서도 홍수 이야기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대홍수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 범람한 사태를 경험한 기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국지적일 수도 있고, 전면적일 수도 있는 어떤 자연재해를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지 않고 인간의 타락과 연계시켜 이해한 성서의 관점이 독특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종종 오용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인간 사회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성서적 통찰의 한 특성을 잘 드러내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그 홍수의 재난이 끝나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물이 점점 빠지면서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열성적인 성서고고학자들은 그 아라랏 산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 덕분에 아라랏 산으로 불리는 몇 개의 산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방주 모양의 흔적이 있는 산, 또는 그 파편으로 간주되는 유물들이 발견된 산이 그렇게 아라랏 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정확한 원문은 ‘아라랏 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지점이 아니라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을 말합니다. 그곳은 대략 오늘날 터키의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를 말합니다. 주로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입증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면 확인해서 나쁠 것 없지만, 그 사실이 확인되어야만 성서의 진정성이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홍수 이야기의 진정성은 결국 파국에 이를 만큼 인류가 타락했다는 사실, 그러나 파국 이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배가 머무르자 노아는 새들을 날려 보내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확인합니다. 첫 번째로 보낸 새가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비둘기는 세 차례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가운데 한 번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 왔습니다. 오늘날 평화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올리브 잎을 문 비둘기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까마귀는 잊혀지거나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구조를 더 깊이 들여다볼 것 같으면 사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까마귀입니다. 우리의 고대 신화를 비롯하여 많은 고대 신화에서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합니다(삼족오, 오딘의 까마귀). 까마귀의 등장은 햇빛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까마귀가 중요한지 비둘기가 중요한지 논란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홍수가 물러가고 햇빛이 내리비치게 된 상황을 묘사하는 옛 이야기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만입니다.

홍수가 그치고 물이 마른 것이 확인되자 방주에 올랐던 모든 생물이 다시 땅 위에 내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8:13의 말씀은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정월 초하룻날 땅 위에서 물이 다 마르기 시작하여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7:11에 의하면 전 해 둘째 달 열이렛날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했으니 꼬박 1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첫 번째 본문말씀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땅 위에 내려온 노아는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을 골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기쁘게 받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모습이 참 ‘인간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주님께서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제물을 받고 인간을 봐주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다짐한 내용이 또한 흥미롭습니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을 멸망시킨 이유가 되었던 사실이 이번에는 다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유예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덕장이일까요? 인간이 드리는 제물과 정성 여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면서 상자 하나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아시는가요? 그 상자 안에는 자신이 미처 구하지 않아 하나님께서 베푸시지 못한 목록들이 잔뜩 들어 있더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그런 하나님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아주 흥미로운 진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태도 가운데서 어떤 하나님이 연상됩니까? 고뇌하는 하나님, 생각하는 하나님, 그런 모습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중대한 신학적 사고의 전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끊임없이 선악이 혼재하는 인간 사회 현실에 대한 성서 기자의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홍수로 악이 일소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치지 않는 악의 현실을 두고, 성서 기자는 어떤 답변을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서 기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닌 인간 삶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통찰에 이릅니다.
‘어차피 인간은 악한 존재이니 그 이유로 다시는 벌하지 말자’는 하나님의 결심은 인간과 땅에 대한 유기, 포기의 뜻이 아닙니다.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이 없다는 체념의 표현이 아닙니다. 악한 인간들의 삶 가운데서도 지켜낼 만한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의 표현입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이 땅이 더 이상 파국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인간의 기대의 표현입니다.

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그 ‘결심’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노아 및 그 자손들, 나아가 모든 생명들과 약속을 맺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9장의 내용이 그 이야기입니다. 애초 에덴동산의 축복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명확하게 다른 점은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인간의 먹거리로 허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죽이는 행위를 명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땅을 파멸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그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그 모양에서,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어원에서 전쟁을 상징하는 활과 같은 것이지만, 그 활을 세워둠으로써 더 이상 파멸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이 이야기는 일방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심에 따라 선포하고 그 징표까지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인정하지만, 장차 또 다시 세상이 혼탁해지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감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토록 처참하게 모든 생명이 파멸에 이르는 사태는 없어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자기 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고전적인 신학적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지만, 또한 더불어 인간 실존과 관련하여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삶의 지속성, 역사의 지속성을 말합니다. 파국에 이를 만큼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는 진실, 우리의 역사는 지속된다는 진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결코 낙담할 수 없는 삶, 결코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을 일깨워줍니다. 설령 부정하고 싶은 것들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실은 긍정할 만한 그 어떤 것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는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세상을 보고 분노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단지 악한 놈들 모두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된 세상 그냥 뒤집어 엎어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소중한 그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의 소중함, 서로 교감하며 아름다움을 일궈나가는 모든 생명의 소중함, 실제로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생명을 떠받쳐주는 그 모든 것들의 관계의 소중함,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일상의 모든 삶, 그것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아직도 진실이 규명되지 않고 책임소재가 판가름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을 두고 침통해질 수밖에 없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맥박이 뛰고 있는 사람마저 시신 처리를 해버린 안일함과 무심함 때문 아닙니까?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분간 못한 안일함과 무심함에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와 믿음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인천공항에서 287일 동안 갇혀 있다 세상으로 나온 앙골라 출신 루렌도 가족이 함께 하는 난민연대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잠시 인사말을 하면서 우리의 난민 정책에 대해 부끄러움과 분노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민법이 있지만 그 법의 취지가 무색할 만큼 난민보호에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난민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 여러 한국 사람들에게 시종일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루렌도씨와 부인, 그리고 천진난만한 네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자유를 얻기 위해 찾아온 손님을 기꺼이 환대할 수 있는 사회, 누구나 안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의 소중함을 그 가족을 통해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을 전하는 오늘 본문말씀은 다소 해학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한편 오늘 이 땅의 현실, 특히 ‘기후변화’로 통칭되는 지구의 현실을 생각하면 어떤 구원의 가능성, 희망이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물이 아니라 불로 멸망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그저 자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예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진실은, 인간이 직면한 파국의 상황 가운데서도, 한 사람이 직면한 어떤 극한의 상황 가운데서도 삶을 가능케 하는 그 어떤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떠받쳐 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또는 각 시대의 국면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인간에게 그 진실을 깨우칠 수 있는 지혜가 허락되었다는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말하는 그 진실을 다시 새기는 가운데, 고통스럽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희망을 붙들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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