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장 절실하지만 가장 경시되는 진실 - 마태복음 25:31~4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1-17 13:57
조회
67304
2019년 11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가장 절실하지만 가장 경시되는 진실
본문: 마태복음 25:31~46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본문말씀은 매우 선명한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복잡하게 헤아릴 것 없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뜻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선명하지만, 그 말씀의 뜻을 저마다의 삶과 관련시켜 받아들일 것 같으면 스스로의 삶을 근본적으로 통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묵직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주께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때에 사람들 가운데 한 무리는 오른편에 또 한 무리는 왼편에 세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생각하면 결코 우리의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앞부분 말씀(34~40절)대로 오른편에 설 수 있을지, 아니면 뒷부분 말씀(41~45절)대로 왼편에 서게 될까요?

주께서는 오른편에 선 의인들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의인들은 반문합니다. ‘아니, 언제 우리가 도대체 주께서 그와 같은 고통을 겪을 때 도와드렸다는 이야기입니까?’ 주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 반대편의 왼쪽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 너희는 찾아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시 왼쪽의 사람들도 반문합니다. ‘아니, 우리가 주께서 고통 받으시는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주께서는 그와 같이 고통을 받고 계신 것을 알았다면 결코 간과하지 않았을 터인데, 주께서 우리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하는 뜻의 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 역시 앞의 답변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과연 어느 편에 설 건가? 아니, 과연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바로 이 물음 앞에 우리를 나서게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평온해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의 의표를 찌르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편히 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는가 하면 동시에 정반대로 가장 무시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컨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해석의 여지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병든 자, 옥에 갇힌 자가 곧 예수님이라면, 내 집 문전에서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면 누가 감히 그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가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점차 그 상층부가 권력화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기관으로서 몫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정신이 근대 이후도 그리스도교 사회 안에서 복지제도의 밑바탕을 형성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말씀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그대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망각할 때 이 말씀은 무시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교회들은 항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저 보좌 위에 계신’ 주님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의탁하는 데는 익숙하고 그 후광에 힘입어 행세하고픈 태도에는 익숙하지만, 곤경에 처한 주와 함께 하려는 의지는 빈약합니다. 아니, 곤경에 처한 주님이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말씀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은 선포합니다. ‘너희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로 여기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세상의 보잘것없는 이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주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와 더불어 주님이 현존하시는 방식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숙연한 진실 앞에 교회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백인들이 다니는 화려한 교회당에 들어가 보고 싶어 배회하는 한 흑인을 보고 예수님께서 ‘나도 들어가 보지 못한 교회당에 네가 어떻게 들어가겠느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교회가 가진 자들의 교회가 되고 만 현실,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만 현실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면,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합니다. 낯선 세계, 낯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개방하고 나설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나설 때 교회 본연의 몫을 비로소 감당하게 됩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 다녀왔습니다. 오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회의를 하면서 당장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격려지지 방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따라서였습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날 먼저 찾아간 곳은 한국도로공사 노동자들의 농성현장이었습니다. 반쪽짜리 합의에 동의할 수 없는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김천 본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고, 일부는 서울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좁은 천막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길거리에 앉아 어려운 사정을 듣고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스스로의 마땅한 권리를 요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그렇게 힘든 사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그 현장에서 발길을 떼는데, 바로 옆의 또 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주도 제2공항 건설 중지를 요구하는 농성현장이었습니다.
제주도를 우리는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제주도는 한국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희생제물이 되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4.3의 상처가 아직도 깊게 남아 있는 터에,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이제는 주민 다수의 의사에 반하여 어떤 필요성 때문인지도 불분명한 제2의 공항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여 결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상적인 대화의 과정이 막혀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단지 하나 예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실을 대표하는 표본과 같은 예가 아닐까요?
여전히 우리 사회는 민의를 제대로 수렴하는 정상적인 절차가 미약하고, 그래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현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가는 데 아직 미숙합니다. 그 자리에서도 연대의 뜻을 밝히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만,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넘어간 저녁 7시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연합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말씀을 나누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 그로부터 5년 반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사건의 진실규명도 이뤄지지 않았고 어떤 형태로든 관련된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촛불 민의로 탄생한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 기대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그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4일 서울 광화문에서의 마지막 기도회를 일찍 예정하고 있던 중 지난 11월 6일 검찰이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을 꾸리겠다고 발표했고, 마침내 11일 공식 출범하였습니다. 14일 기도회에서 증언을 맡은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는 절규했습니다. 맥박이 뛰는데도 시신 취급받아 결국 죽음에 이른 동빈이가 만들어준, 진실규명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외쳤습니다.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참사의 진실규명이 5년 반이 넘는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놀랍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 놀라운 일을 끊임없이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 놀라운 일도 전혀 놀라지 않게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한 순간에 스러지고, 게다가 그 생명의 여섯 배에 달하는 또 다른 고귀한 생명이 매년 일터에서 스러져가고, 49년 전(1970)의 전태일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26년 전(1993)의 서해상 참사에도 불구하고, 1년 전 김용균 군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런 사태가 지속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절대로 정상이 아닙니다.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가장 당연한 진실이 가장 소홀히 여겨진 결과입니다.
우리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바라는 것은 그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교회가 서야 할 자리, 오늘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자리, 그곳은 아픔이 있는 그 현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현장을 찾아 나서고 그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요청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날 리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누구든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세상을 향하여,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고 마음을 쏟는, 진정한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령 우리가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지향이 그렇게 열려 있으면 우리가 바라는 바 뜻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회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이뤄지는가, 절망스러운 현실을 보면 그걸 믿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믿음이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삭막해졌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의에 대한 믿음, 그것도 오늘 말씀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가장 낮은 사람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믿음이 있기에 세상은 길을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의 진실을 새기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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