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 로마서 13:8~1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01 15:25
조회
64
2019년 12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본문: 로마서 13:8~14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충족되지 않은 상태, 곧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은 역설적이어서, 그 결여의 상태가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욱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놀라운 가능성과 희망으로 귀결됩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다가올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대림절 첫 주일, 오늘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두 토막으로 나눠진 말씀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과 태도를 깨닫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앞부분(8~10)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의 정신을 이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하게 만들었다는 유명한 로마서 13:11~14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노래 소리와 같은 아이의 음성으로 들리는 “집어라” “읽어라”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마침 곁에 있는 성경을 펼쳤더니 바로 이 말씀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읽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이 이 말씀으로 곧바로 평안의 빛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찼고 의혹의 모든 그늘이 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극적인 깨달음이나 회심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깨달음의 방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깨달음으로써 결단에 이르도록 촉구하는 말씀(11~14)과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역설하는 말씀(8~10)을 동시에 보았습니다. 이 로마서가 나중에 짜깁기 편집된 글이 아니라, 일필휘지로 쓴 바울의 편지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토막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연속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때가 가까웠고 따라서 깨어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과 율법의 완성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토막 난 두 이야기가 아니라 연속되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몫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욕을 채우고 육신의 일을 꾀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수양이나 경건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면 무너져 내리고 마는 삶의 방식, 또는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질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사랑이 빠지면 무의미해집니다. 해도 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든 영원한 갈구의 대상이 되고, 그러기에 모든 사람의 진정한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가장 불가해하지만, 인간 삶에서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 가장 적극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말씀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풀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빚을 지지 말아라!’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공동번역 성서> 번역문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빚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따르면,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세진 모든 이들에게 그 신세진 것을 성실히 다 갚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고 도의적ㆍ도덕적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의무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 인간들의, 어찌 보면 운명적 삶의 한계, 범위를 밝혀 주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바로 ‘사랑의 빚’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법적이거나 도의적인 의무 내지는 빚은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갚을 기회를 잃었다 하더라도 살다 보면 또 다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습니다.

대체 ‘사랑의 빚’이 무엇이기에 갚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 또는 이른바 애정의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리스어로 굳이 에로스와 아가페를 구별해야 했던 까닭이 있을 겁니다. “끊임없이 욕구하는 에로스가 아니라 항상 꺼지지 않는 아가페”(칼 바르트)가 구별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삶은 ‘나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나 아닌 타인의 덕에 의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인간이 더불어, 서로 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입니다.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인식’에 이르고, 그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이 곧 사랑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삶은 해도 해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에 빚진 삶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필요한 삶의 모든 관계에서 덕을 입은 것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다 갚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갚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쓰는 물건이야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받은 생명 그리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누리는 안정감, 든든함, 이런 것들은 과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흔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효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갚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도 진정으로 다 갚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돈으로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물건 값 역시 어떤 의미에서 다 치른 것은 아닙니다. 물건 값을 치를 때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비용만을 치릅니다. 어떤 노동자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쏟은 심혈과 정성에 대해 전적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안에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원료를 캐내어 온 자연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투여된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평균비용만 치른 채 값을 다 치렀다고 안위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무 내지 빚은 일대일의 차원에서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내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웃에게 빚진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을 기대하는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그 어떤 목표와도 대체될 수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내 곁의 형제자매와 이웃, 또는 그 어떤 타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몫을 다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조건이나 목표 달성에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워하고 표류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 여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성패를 판가름한다면 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 삶의 성패를 판가름할 수는 없습니다. 밥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어떤 조건들이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완성에는 한계도 없고 경계도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실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산다면 언제나 우리는 빚진 느낌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놀라운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느낌을 갖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삶은 따뜻하고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은, 그러기에 인간 삶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오히려 일깨워줍니다.

49년 전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이 노든 노동자들의 아주 단순한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을 때 사람들이 놀라고 우리 사회가 놀랐습니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면...’ 그 말에 양식 있는 사람들이 놀랐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채무의식’의 발로였습니다. 그 의식은 ‘연대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사회는 가장 역동적인 한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고, 그 만큼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 있고, 그래서 서로가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살아 있는 사회는 건강합니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또한 건강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한 기사를 보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1월 21일자 <경향신문>의 신문 1면은 2018년 1월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천2백 명의 명단을 실었습니다.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그 이름과 죽음에 이른 사연을 기록하였습니다. 떨어짐, 끼임, 깔림, 뒤집힘...
며칠 뒤 작가 김훈은 “죽음의 자리로 또 밥벌이간다”는 제목으로 특별기고문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약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이다. 제도화된 약육강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동일한 유형의 사고에 의한 떼죽음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방치되고 외면될 수는 없다.” “26일부터 나오래. 한 달에 이틀 쉬어. 급여는 150만원보다 조금 높아. 6개월에서 1년 정도 부사수하다가 사수 달면 300만원부터 시작한대.” 이 말을 끝으로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의 주인공 이야기도 환기시켰습니다. 수 없이 좋은 말이 있고 수없이 그 해법이 있지만, 그 말을 되풀이해도 안 되고 해법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울 수밖에 없다며 “아이고 아이고” 통곡으로 끝맺은 작가의 마지막 말에 다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대중 스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사회, 그렇게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 실상입니다.

그 현실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익히겠습니까?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을 갚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하는 삶, 그 삶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삶의 기운이 우리 안에 있고, 그 기운을 세상에 펼쳐갈 뜻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교회가 그 삶의 기운으로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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