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새겨진 진실 - 고린도후서 1:18~2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22 14:36
조회
1158
2019년 12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새겨진 진실
본문: 고린도후서 1:18~22



사도 바울은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할 때는 별로 말주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서신들을 볼 것 같으면 유창한 달변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글말과 입말이 그 분위기가 다를 수 있는데, 바울의 경우 사람들에게 그 차이가 조금 크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후 10:10) 이에 대해 바울은 곧바로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쓰는 말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0:11)
말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서 본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진정성에 대해 의혹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의 글말이고, 그것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매우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의 본문말씀도 글말로서, 사실은 매우 생동감 넘치는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정경을 확정한 것은, 신앙의 표준을 확립하려는 시도이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성서를 생동감 있게 읽을 수 없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저 거룩한 말씀으로만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대하면, 기록자의 인격이나 개성, 또는 처해 있는 정황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 기록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고, 구체적인 인격과 개성을 지닌 주인공의 기록이라 볼 것 같으면, 훨씬 생동감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서신의 기록자로서 사도 바울의 생생한 감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면한 상태에서 어떤 감정의 상태에 있는지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고, 따라서 그 감정의 상태를 헤아리면서 보게 되면 더욱 그 말씀의 생동감을 실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말씀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그 상황이 나오는데, 그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또 가기로 했는데, 계획의 변동으로 그 약속을 당장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소홀히 대하고 빈말을 하는 사람처럼 되어버려서,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해명합니다.
바로 앞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했던 것이겠습니까?”(1:17)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자신의 진정성을 해명하는 말치고는 상당히 거창합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그 근거로 신실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어떤 의중일까요? ‘내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빈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어조입니다. 거창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설득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옹호로 그치지 않고 신앙의 요체를 밝히는 신학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 변증에서 핵심은 이 구절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의 의미는 매우 분명한데도, 교회 현실에서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고 ‘아니오’는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예’만 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약될 때 이 말씀은 오용됩니다. 그 ‘예’가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오용됩니다. 그것도 불의한 권위에 맹목적 순종을 정당화하는 것이 될 때 그 오용은 극에 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예’만 있고 ‘아니오’는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구현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났느냐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신실한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났느냐?”, 거기에 대해 “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아니오” 할 만한 것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신실한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기 예수 탄생을 맞이하는 대림절 넷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여기서 환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불의를 보고도 무조건 “예”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불의를 보고 “예”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 권위에나 맹목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께 “예” 하는 것은, 세상의 권위에 대해 오히려 “아니오”로 직결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일행의 확신을 피력합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하게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실한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까닭에 자신들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말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 곧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따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일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 증거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표로 인을 치셨다고 합니다. “그 보증으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보증으로 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요,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주었으니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은 것을 확실히 구별하는 기준이 있기는 합니다. 마음이 뜨거운 것이 그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뜨겁다는 것도 안 보이니까 더 확실한 증거를 찾습니다. 방언이 그 하나의 지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이 그런 것일까요?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방언에 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성령의 의미를 헤아릴 만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보증으로 마음에 주신 성령은, 곧 그들의 인격과 삶을 뜻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그 인격과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을 오해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을 알지 않습니까, 정말 빈말이나 하고 다닐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셈입니다. 물론 다시 확인하지만 바울은 단지 그렇게만 말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허튼 짓을 할 사람이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한 자신을 동시에 피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냥 상대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 믿음으로 인한 자신의 삶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의 중심에는 언제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어떤 형상을 받들고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새기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는 곧 ‘사건’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그저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일방적으로 선포된 명령과는 다릅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그 사건의 의미를 요한복음은 이렇게 한마디로 집약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 가운데서 말씀의 진실을 드러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육신이 된 말씀’의 의미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 진정한 대화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거는 방식,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걸어오신 하나님에 대한 응답의 방식, 대화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기도라는 언어행위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은 삶으로 응답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계명으로 말씀을 던져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소 사랑의 화신으로 인간 가운데 삶을 사셨다는 것은, 그에 상응한 인간의 응답 역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우리 마음에 주신 성령”, 그 성령의 열매로 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그렇게 열매를 맺는 삶, 우리의 전인적 인격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를 주셨다는 확신, 그 믿음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신감, 그 모두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 태도는 맹목적 독단에 빠진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흔히 믿음 좋다는 말은 맹목적 독단에 빠진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증표라고 내보일 만한 삶이라면, 그런 독단과는 상관없습니다. 뭔가 모를 인간적인 매력, 뭔가 모르지만 흠모와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힘, 그것이 알고 보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아차리게 할 만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증거로서 성령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을 지닌 삶입니다.

<교수신문>은 2019년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를 선택하였습니다. 한 몸에 머리가 둘 달린 새를 말하는 것으로, 머리 둘이 다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분열된 세상, 분열된 인격이 맞이하게 되는 파탄을 경고하는 경구입니다.
요새 세상을 소란케 하는 선동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이런 정치적 선동에 생사가 판가름 나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요? 아니, 하나님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엇갈린다고 말하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금과옥조로 지키던 사람이 이제는 폭력적인 시위로 국회를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입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꾀나 자주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의 언행과 그의 인격을 믿을 수 있을까요?
국민의 대표성을 엄격히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정당이 집권세력이 되자 당리당략,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분열된 세상, 그렇게 분열된 인격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결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진정으로 성령을 받아, 신실하고 진실한 삶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세상을 감동시키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땅에 오시는 아기 예수를 반기는 것도, 스스로 그 삶을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진정한 기쁨으로 예수를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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