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언하길 열망하십시오 - 고린도전서 14:20~25[유영상 전도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0-02-09 19:14
조회
3419
2020년 2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언하길 열망하십시오
본문: 고린도전서 14:20~25
설교: 유영상 전도사




오늘 말씀의 핵심은 ‘예언’입니다. 예언은 구약성서에서 다루고 있는 걸로 익숙한데, 신약성서에서, 그것도 바울서신에서 예언에 관해 말씀을 나누다니 어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신약성서에서도 그 의미를 보존하고 있으며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이 서신에서 ‘예언’은 구약성서에서 다루고 있는 예언서의 예언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 바울이 당면한 긴박한 갈등 속에서 ‘평화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전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언은 긴박한 갈등과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합니다. 또 긴박한 사회 속에서 그 사회를 마주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교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오늘 말씀나누기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위치한 여러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환기하는 예언의 의미와 그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언이란 무엇인가

먼저 예언의 의미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예언은 무엇일까요? 미래에 발생할 사건과 그 결과들을 미리 말하는 스포일러가 되는 일인가요? 아니면 가장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자신이 신의 자리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대리자인 것처럼 행새할 수 있는 자격증인가요? 둘 다 아닙니다. 예언은 미래에 올 시대를, 시대의 징조를 그럴싸하게 맞추고, 그걸 과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언은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그 사건의 앞으로의 움직임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하는 사건이자 행위입니다. 또 예언은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풀이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 나의 능력으로 과시되는 허울이 아니라 이웃과의 교제에서 함께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우리와 하나님의 소통이라는 의미 역시 일깨워 줍니다.


2. 본문 주석 케네스 베일리,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김귀탁 옮김(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p.585~610


이제 본문으로 들어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에게 촉구한 ‘예언’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함께 읽은 말씀본문 14장20~25절이 예언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만, 먼저 14장 1절부터 이어지는 예언과 예언 주변에 있는 여러 장치들에 대해 살펴본 뒤 20~25절의 단락을 면밀히 파악하고자 합니다.

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의 역할과 효과, 그리고 그 기능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은 예언을 방언과 비교하면서 그 의미를 밝힙니다. 바울은 1절 도입부에서 ‘신령한 은사를 구하면서 동시에 예언의 능력을 구하는 데 더욱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2~4절에서는 예언과 방언의 기능과 소통 대상에 대해 말합니다. 여 대목에서, 예언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써 교회에 덕을 세우지만, 반면 방언은 사람들과 말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고 자기에게만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는 ‘세우다’입니다. ‘세우다’는 헬라어로 οἰκοδομέω(오이코도메오)입니다. 이 단어는 ‘건축하다’, ‘세우다’, ‘확고히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천막을 치는 일에 종사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서 이런 은유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은유는 고린도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신앙의 건축가들이 되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주체적 건축가가 되라는 촉구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언과 방언을 비교한 바울은 5절에 들어서 잘 정리한 예언과 방언의 차이를 뭔가 모호하게 비틀어 놓습니다. 방언도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수신자들이 모두 방언으로도 말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합니다. 이 내용은 1~4절에서 말했듯이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며 예언을 추켜 세운 바울의 모습과는 대비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4절까지의 진술을 전복시키는 말은 아닙니다.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 이웃간의 관계를 지향하는 신앙보다는 개인의 덕을 위한 신앙에 몰두하는 방언 매니아들을 아예 무시하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방언과 예언은 선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구도에 놓여있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방언을 하는 신자들도 공동체의 유익을 고려하여 모두의 덕을 위해 필요한 예언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렇다고 방언은 보조 역할로만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방언은 단순히 예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연 역할로만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방언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 고린도 도시의 핫한 주제였습니다. 이러한 암시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에 대해 말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12:4~11). 공동의 이익을 거두기 위해 성령은 모두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인데, 은사는 본래 중국집에 가서 메뉴를 짜장면 보통으로 통일하는 게 아니라, 짜장면, 짬뽕, 볶음밥, 마파두부밥 등 다양한 메뉴로 가득한 식탁입니다. 바울은 그런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지체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본래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는 신앙공동체라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하지만 그 은사가 획일화되어 단 하나의 은사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왜곡돼 받아들여진다면, 성령의 선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말해줍니다. 또 그러한 가치와 문화가 성령의 선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발현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말해줍니다. 고린도 교회들이 그러했습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평등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은사의 우열을 가르며 공동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능력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암시는 12:7~11에서 다양한 은사를 성령이 하시는 일로, 우열을 명시하지 않고 설명하는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또 12장27~31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을 말하면서 모두가 사도이고, 예언자이고, 다양한 은사가 동등한 관계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말하는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다양한 은사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교제하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고린도 교회들에서 진정하게 구현되기 바라는 바울의 권면이 매우 절박해 보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4장7~12절 대목에서는 소통에 관해 말합니다. 방언은 소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는 겁니다. 이를 전투에 비유하며, 전투를 준비하는 데 분명하지 않은 나팔 소리가 무슨 소용이며, 분명하지 않은 소리가 연주에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 비관적으로 내다봅니다. 소통 불가능, 이것은 바울이 비판하는 방언의 핵심 영향 중 하나입니다. 본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체들 사이의 소통과 유기적 관계가 핵심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비판이지요. 바울은 기독교의 언어와 진리가 세상과 소통하며 사건 속에서 역할을 수행해야지, 자신의 유익만 따지는 방언 중심의 종교 행태를 비판합니다. 방언만 고집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만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의 이익에 대한 관심에만 머무르지 말고, 세상과 소통하고 그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도모하라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칩니다.

방언이 지배하는 고린도 교회들 사이에 이 위기를 돌파할 가르침으로 바울은 ‘예언’을 말합니다. 예언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은 앞서 읽은 14장20~25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울은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바울은 이사야서 28장11~12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언을 교회 교우들에게 주신 이유에 대한 근거를 밝힙니다. 고린도전서 14장20~25절을 비추어 보자면 이사야서 본문은 28장9~13절로 확장하여 그 메시지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20절에서 생각하는 데에 어른이 되라는 바울의 말과 이사야서 28장9절의 ‘젖뗀 아이들’은 상통해 보입니다. 또 13절에서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고린도전서 14장25절의 ‘엎드려 경배하는 그들’과 상통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예언의 메시지에 경청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지적하며 비판합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들의 태도가 예언자 이사야가 당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비슷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28장을 인용했습니다. 재난이 닥쳐도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린도 교회들의 교우들도 여러 일들로 교회의 방향성과 가치들을 희석시키는 혐의에 대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벌을 받아도 마땅한 교회에 벌을 안 받을 수도 있는 한 가지 해답을 제안합니다. 그 대목은 24절부터 등장합니다. 24절에서 바울은 한 가지 가정을 합니다. 바로 ‘모두가 예언을 하면’입니다. 모두가 예언을 하면 각 사람의 숨은 마음이 드러나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고백은 교회 교우 모두가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죄에 대한 공모혐의를 모두 토해내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자신을 비우는 행위입니다. 또 이 고백을 통해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던 가치들을 뉘우칩니다. 또 자신 안에 가득했던 가치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교우들과 교제하는 유기적이고 공생하는 가치가 유익하다는 것, 앞으로의 나를 그 가치들로 가득 채울 것을 선언하는 고백입니다. 예언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20~25절을 통해 예언의 역할과 그 의미에 대해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만 봤을 땐 방언과 비교되는 방언 그 너머의 은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방언으로 획일화된 은사 문화 속에서 다양한 은사가 골고루 퍼질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예언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을 도모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예언의 의미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당시에 어떤 갈등들이 있었길래 바울은 이토록 절실하게 예언을 촉구했을까? 왜 바울은 예언을 통해 공동의 덕을 세워서 교회 교우 간의 끈끈한 유기적 관계를 절실히 필요해 했을까요?



3. 고린도 도시의 갈등들: 사회사적 관점으로

이제 고린도 도시에 있었던 갈등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회들에서 있었던 갈등들을 살피면서 이 해당본문을 분석할 때 해당 본문에 등장하는 대상의 관점을 빌리고자 합니다. 바로 24절에 언급되는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초신자)’입니다. 20~25절에서는 등장인물그룹이 ‘믿는 사람들’, ‘딴 나라 사람(외국인)’, ‘믿지 않는 사람(불신자)’, ‘갓 믿기 시작한 사람(초신자)’입니다. ‘딴 나라 사람(외국인)’은 이사야서 인용문에만 등장하고 ‘믿는 자들’은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며, ‘믿지 않은 사람’은 정말 그리스도 신앙과 무관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목할 것은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초신자)’인데요, 그들은 이제 막 교회에 유입된 사람들일 겁니다. 그들은 당시 고린도 도시의 여러 문화들이 교차된 존재, 다양한 도시 문화에 익숙한 존재였으리라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마 고린도 교회 안에서 갈등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갈팡질팡하는 갈등의 담지자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갈등들이 있었을까요? 대표적으로 우상 숭배(10장)와 성만찬(11장)과 문안 인사(16장)이 그러합니다.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초신자)’의 관점으로 한 번 이 두 사건을 살펴봅시다.

먼저 고린도 도시의 탄생 배경을 살펴봅시다. 고린도 도시는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고린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학살 당했으며,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 하나였던 고린도는 처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 후 기원전 44년, 로마는 고린도에 식민 도시를 건설합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도시에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이루면서 경제적 착취를 용이하게 했습니다. 고린도는 동부에 위치한 제국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거주민들이 사라진 이 도시에는 로마의 퇴역 군인들과 해방 노예들이 보내집니다. 이제 고린도는 새롭게 탄생한, 로마 제국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신도시로 발돋움합니다.

이러한 고린도 도시에서는 우상 숭배가 정말 만연했습니다. 아프로디테(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신전과 데메테르(그리스 신화의 곡물과 수확의 여신이며 올림포스의 12신의 하나)의 지성소가 존재하여 헬레니즘 문화는 유지되어 있었으며, 똑같은 신전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신상을 설치하여 로마 황제숭배 제의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황제숭배는 만연했습니다. 이러한 황제숭배는 속주 귀족들의 정치적 책략을 넘어선 종교였습니다. 적어도 고린도 도시에서는 확실합니다. 황제숭배 제의는 아우구스투스의 권면과 고린도 도시가 속해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속주들의 자발적 종교행위를 통해 장려되고 뿌리내렸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은 이러한 황제숭배의 종교적 힘을 바탕으로 견고히 세력을 유지했고, 종교로, 문화로, 윤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황제숭배는 길드 차원에서 더욱 장려됐습니다. 여기서 길드는 사조직이지만, 도시 의회 차원에서 장려했으며 누구도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의무가 부과된 집단이었습니다. 길드는 철저히 수직적 피라미드 관계로,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는 특히 식탁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황제숭배에 바쳐진 희생제물은 길드 차원에서 먹을 수 있게 제의 후에 각 길드에게 분배됐습니다. 이들의 식탁은 계층에 따라 구분돼 있었고, 후원자 귀족이 먹고 남은 희생제물을 계층 순서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얼마만큼 남아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려면 필히 길드에 속해서 황제숭배의 희생제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수직적 관계로 구성된 길드는 후원자의 입맛에 따라 운영됐고, 그 속에서 모두의 권리는 고려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먹는 식탁을 차립니다. 이 식탁에는 계층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먹고 마심으로 나눕니다. 이것이 진정한 모임이라며 기쁨을 만긱합니다. 교회의 후원자는 돈이 많은 귀족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후원에 기쁨을 만긱하며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길드의 후원자는 귀족, 교회의 후원자는 야훼 하나님. 길드의 음식은 진멸을 기념하는 황제숭배의 희생제물, 교회의 음식은 우리의 죄를 위해 기꺼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 이러한 길드의 문화에 익숙했던 ‘갓 믿기 시작한 사람(초신자)’는 교회에 와서 많은 갈등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을 것이며, 실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황제숭배에 대항하는 교회의 성만찬은 이렇듯 로마제국의 문화와 적대하여 전복적인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로 ‘문안 인사’입니다. 문안 인사는 고린도전서를 포함하여 보통 바울이 편지를 마칠 때 사용하는 인사구입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반체제적인 인사입니다. 왜 반체제적인 인사인지 알기 위해서는 길드의 일과를 다시 이어서 봐야합니다. 길드는 후원자인 귀족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녁식사를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다음 날 꼭두새벽까지 일과는 연장됩니다. 길드 안에서 가장 하위 계층에 속한 피보호자는 꼭두새벽에 후원자 귀족의 집 대문 앞에 가야합니다. 왜일까요? 바로 ‘문안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 문안 인사의 선착순으로 경쟁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후원자 귀족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족의 눈에 띄어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고린도 도시의 일반적인 문안 인사 문화는 이렇듯 수직적 관계에서의 귀족에 대한 마땅한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작성한 편지를 보면 바울은 문안 인사를 모두에게 합니다. 여기서 문안 인사의 대상은 후원자 귀족도 아닙니다. 교회 교우 모두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두가 감사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평등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의미로 문안 인사를 이렇게 전유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는 문안 인사에 의해 시작된 갈등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습니다만, 문안 인사 문화는 분명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지적받았을 것입니다. 충분히 상상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로마 도시의 길드와 교회,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두 관계는 서로 적대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그러한 적대관계를 진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적대의 유입을 이끈 ‘믿지 않는 사람’과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은 교회 교우 모두가 예언을 한다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할 것이라고 바울은 확언합니다. 이렇듯 예언은 개인의 이익과 수직적 관계를 통한 착취와 폭력으로 살아가는 생활 양식에 패배를 선고합니다. 예언은 평등한 가치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일깨워 줍니다. 그런 예언은 사회가 앓고 있는 갈등으로 인한 아픔을 일깨워 주며, 갈등의 징조를 발견하여 참된 하나님의 메시지로 그 일을 마주하라는 신앙의 결정체로 요청됩니다. 예언은 그렇게 우리에게 시대의 갈등을 발견하라는 촉구를 넌지시 던집니다. 아니,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4. 마치며

수많은 매체를 통해 수많은 소식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시대’를 표상으로 발견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무엇이 갈등의 원인이고, 원흉인지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니 발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2,000년 전에는 갈등의 원인을 ‘황제숭배’와 황제의 폭력 통치 때문이라고 단순명료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와 체제, 문화들이 교차해 있어 개혁의 대상, 혁명의 대상을 명료하게 지적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민중이 사라진 시대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중이 감춰진 시대입니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나마 민중이 어느정도 고정된 실체로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유동하는 민중, 상황에 따라 처소를 매번 옮기는 존재이므로 고정된 실체로 식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회입니다. 집을 가질 수 없는 사회, 비정규직 취직이 당연한 사회, 학자금 대출이 높게 쌓여 있는 현실이 당연히 사회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삶을 구축하기 보다는 부자들의 삶을 모방하는 기회로 하여금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부자들의 삶을 충분히 모방할 수 있는 sns와 저가항공, 옷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것들을 구매한들 꽤나 괜찮은 삶을 살아간다는 망상으로 사유함을 멈추고 시대에 순종하게 됩니다. 청년들과 가난한 사람들 역시 올리브영과 스타벅스, 타워팰리스의 상가들, 롯데타워의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을 작동케 하는 기업 자본가들은 땅값을 폭등하게 하고 손쉽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제도와 힘을 확보하면서 유지합니다. 이에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노동자로 취업하게 하면서 노동자들을 ‘모순의 담지자’로 양육하려는 작전을 은밀하듯 공공연하게 확립합니다.

내 것이 없지만, 내 것이 없는 게 당연한 사회.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을 유지시키는 문화와 체제가 은밀한 곳에서는 내 삶을 갉아 먹고 있는 사회. 은밀한 곳에 숨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꺼려하는 주체들이 그들이 만들어 낸 시계와 중력에 따를 수 밖에 없도록, 그 속에서 발생한 고통으로 서로의 탓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투쟁의 전선을 혼란시키고 있는 사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지만 전망이 보이지 않는 최악의 사회 속에서 예언은 무엇일까요?

식별되었지만 알 수 없는 문제들, 아직 식별되지 않은 문제들. 저희가 당면한 수많은 사회문제는 원인을 숨긴 채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언하길 열망하십시오. 우리가 시대의 위기 속에서 원인은 분명히 찾을 수 없지만, 어른과 같이 시대의 갈등을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집시다. 이 힘으로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노동시장과 그 때문에 괴기하게 운영되고 있는 우리 곁의 당연한 시스템들에 딴지를 겁시다.

특정 계급에만 유익한 노동시장과 시스템이 아니라, 모두가 유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초석을 제기할 수 있는 예언, 그 예언을 저마다 잘 발휘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고 공생하는 가치가 실현되는 지혜, 새로운 지혜를 제시하는 천안살림교회 교우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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