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22 온라인 가정예배] 생명을 위한 자각적인 선택 - 요한복음 12:20~26 [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3-21 20:47
조회
1202
2020년 3월 22일 사순절 넷째 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 인도: 담임목사
피아노: 백수현 장구: 정문자 찬양: 김광식 김성윤 서윤아 정문자 촬영: 최시내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트러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처지를 고백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여 주시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손길을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두려움과
낯선 경험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을 선택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누가 주를 따라”(새찬송 459)/ 통일찬송 514)/다같이


묵상과 성찰 / “Jesus Christ's Love”(타니모토 마사오 谷本 正夫 연주)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이지수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요한복음 12:20~26 / 인도자


말씀나누기/ 생명을 위한 자각적 선택 / 최형묵 목사


2020년 3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생명을 위한 자각적인 선택
본문: 요한복음 12:20~26

본문말씀은, 유대의 명절 곧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일행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겹치는 이야기들도 많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는 등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헬라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종족상 그리스인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들이 굳이 자기들이 말을 건네기 쉬운 두 제자, 곧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빌립과 안드레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을 뵙고자 청한 상황을 보면, 확실히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성전 앞마당에 있었다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경계 안에는 들어올 수 없었기에 누군가를 건너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그리스 사람들’이 이른바 정통 유대인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을 뜻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본문말씀 바로 앞의 내용, 곧 19절을 볼 것 같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환호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탄식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 곧 그리스 사람들이 갈릴리 출신인 빌립(사실 벳새다가 엄밀히 갈리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인식된 당시의 통념을 반영)에게 말을 건네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말하고, 빌립이 다시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께 그 말을 전달하는 상황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바로 그 상황을 극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도드라진 대비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유대 백성들의 선생으로 간주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데, 엉뚱한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세상이 지금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진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사람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찾고 있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청대로 만나겠다는 의지를 더 적극적으로 표명한 셈입니다. 이방인들이 당신을 뵙고자 하는 상황, 그것이 곧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중대한 조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먼저 예수님의 이 말씀만 볼 것 같으면, 드디어 예수님께서 이방인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마침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그 영광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예와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말씀은, 우리가 복음서나 서신의 곳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영생을 누리고, 섬기는 사람이 거꾸로 영광을 누린다는 역설입니다. 예수님의 선포,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역설의 진실을 믿습니다. 상호모순이 되는 역설, 그래서 그 말 자체로만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설, 그것을 그리스도인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백히 그리스도인라면 이 진실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른 복음서들에서 비어 있는 여백을 친절하게 메워주는 역할을 하는 요한복음서는, 이 대목에서도 아주 친절하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적절한 비유를 통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숱한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모두 농사짓는 일과 관련되어 있기에 농사짓는 농민들, 당시의 민중들이 금방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끝나는 오늘의 비유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영생을 누리고, 섬기는 사람이 거꾸로 영광을 누리는 역설의 진실은 바로 이 비유에 함축되어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톨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기존의 형체가 사라지지만, 그로써 싹이 틔어나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는 이치,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진실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아집, 자기만의 전통,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깨달음은 일상적인 생활윤리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당신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당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곧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던 그 삶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 곧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기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본문말씀은 예수를 거부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를 뵙고자 찾아 나선 이방인들을 극명하게 대비해주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의 정통, 곧 자신들의 세계에 머물며 그것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 열심에서, 그 성실함에서 그들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그 열성 때문에 새로운 구원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자신들만의 그 세계를 박차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속한 헬레니즘 세계가 얼마나 강고합니까?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뿐만 아니라 이슬람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문명을 형성한 두 기둥으로 간주될 만큼 유대인의 전통과 그리스인의 전통은 저마다 독창적이고 강력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동급으로 간주되지만, 예수 당시 영향력으로 보면 어떨까요? 유대인의 전통은 그리스인의 전통에 비해 미미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제국을 경유하여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만큼 그리스인의 전통은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인은, 그 세계 안에서 호흡하고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세계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전향한 사건, 그 사건의 의미를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만큼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며, 바로 우리 자신들 가운데서도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낯선 경험을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질병 그 자체의 공포는 새삼 말할 것 없거니와 인간 삶의 모든 국면을 새롭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문제, 생명권의 문제, 정치체제의 문제 등 다각도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로 오늘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가 어쩌면 경제관념의 변화 조짐일지도 모릅니다. 경제는 경제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이 현대 경제학의 믿음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로 그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시장 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는 잠잠해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난망해보이기만 했던 기본소득 보장에 관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단지 경제 살리기로 귀결될지 진짜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새로운 경제운용으로 귀결될지 숙제이지만, 지금까지 지켜왔던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코로나로 주요 생산활동이 중지되어 대기오염이 준 만큼 더 많은 사람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는 진단도 있는 만큼 앞으로 어떤 지혜가 발휘될지도 모릅니다.
교회 또한 겪어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들어섰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모이는 예배 대신 흩어져 있는 그 자리에서,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이는 예배가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중요한 한 방식이라는 것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오늘 직면한 생명의 위기 상황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면,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것마저도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더 큰 예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경험이 임기응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이는 교회를 잠시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 유대를 지속할 수 있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구현해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교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구현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루 빨리 얼굴을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역시 얼굴을 마주하면서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그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만나지 못하는 이 시간을 그저 정지된 시간으로 여기기보다 진정한 교회됨의 의미,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생각하고 구현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선택하여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믿음을 지향합니다. 끊임이 삶을 돌아보고, 생각하며, 낡은 세계를 벗어나 진정으로 생명을 보장하는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 길에 기쁨으로 함께 나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사랑의 종소리”(살림의 노래 105)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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