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9/6 온라인 공동예배]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그 해법 - 사도행전 6:1~7[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9-05 20:35
조회
380
[9/6] 창조절 첫째 주일, 온라인 비대면 주일 공동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촬영․영상편집 최시내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온 만물의 어버이가 되신 주님,
이 땅과 저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실 때마다
주님은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며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모든 생명을 내신 주님이 저희 또한 내셨으니,
온 만물이 한 가족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게 도와주십시오.
나무와 흙을 주님의 몸처럼 여기게 하여 주십시오.
뭇생명들과 함께
같은 창조의 주님을 노래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온 삶을 돌이켜
아름다운 세계를 일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온 세상 위하여”(새찬송 505 / 통일찬송 268)/ 다같이


묵상과 성찰/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까”(흑인영가)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나영주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사도행전 6:1~7 / 이지수 교우


말씀나누기/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그 해법 / 최형묵 목사


2020년 9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그 해법
본문: 사도행전 6:1~7

본문말씀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갈등의 해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공동체에 발생한 갈등에 관한 현명한 해법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해법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말씀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성장해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당대 상황을 헤아려 볼 때 아람어였을 것)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정보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어/아람어를 하는 유대인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은,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 곧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타지에 살다가도 노년이 되면 조상들의 땅에서 보내고, 그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꽤 살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 이 이야기는 당대의 구제사업, 곧 공동체의 복지에 관한 관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구제사업은 유대교 회당을 통해서도 지속되어 왔습니다.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주 금요일마 14끼 식사비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원했고, 주민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은 그때그때마다 먹을 것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제의 전통을 따랐지만, 그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홀로 된 할머니들은 사실상 정착한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구제를 받는 방식으로 지원받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가족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지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홀대받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를 문제시하여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서가 전하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최초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차별로 인한 갈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이 갈등에는 단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지 출신의 차이만이 아니라, 신앙색깔의 차이, 성향의 차이가 개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별은 늘 그렇게 중첩됩니다. 토착 유대인들은 대체로 율법에 대해 충실한 편인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율법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을 취한 편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 문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이 지역 토착민으로서 자신의 임의대로 구제행위를 했다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에게 친숙한 이들을 우선하여 돌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초의 이 갈등 상황을 놓고 열두 사도와 회중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열두 사도는 효과적인 역할분담을 그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사도들은 이 사태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있지만, 효율적인 역할분담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별도의 사람들을 뽑아 음식 베푸는 일을 맡기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별도의 역할을 부여받을 사람들의 선출을 회중에게 맡고, 그 결과 일곱 명의 일꾼이 뽑힙니다.
흔히 이 이야기는 최초의 교회 직분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집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장로라고 불러야 할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딱히 명시하지 않습니다. 직분의 분화는 분명하지만, 오늘날처럼 제도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역할도 전적으로 그야말로 배타적으로 분화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도자인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반대로 결정적으로 그 일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스데반이 청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내용이 곧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의 분화는 위계적인 서열을 매기는 것과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배타적 경계를 확정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공동체의 온전한 보전을 위한 효과적인 역할분담 체계를 형성한 것입니다. 각기 맡은 은사를 선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새로 뽑힌 일곱 일꾼은 한결같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안디옥 출신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니골라라는 사람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모두 토착 유대인은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 홀로 된 할머니들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로부터 소홀히 되었을 때, 그 공동체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당사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로 선출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 알아서 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들이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배제된 이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덕을 온전히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공동체의 갈등에 대한 해법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결여된 이들의 대표성을 전적으로 보장하되, 그 대표성이 전체 공동체의 온전함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한 해법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말미 7절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해법이 행복한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토착 유대인으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독립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상상력을 확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공동체 안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함으로써 그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갈등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갈등의 해결방식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갈등을 한쪽의 일방적인 힘으로 눌러 무마하거나 일방적인 힘으로 관철한다면 그 사회는 미숙한 사회요, 갈등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여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구성원에게 만족할 만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갈등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현명하게 대처하는 성숙한 사회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요즘 하늘에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안타까워하는 두 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히포크라테스입니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목사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속앓이를 하시고, 마찬가지로 도대체 본분을 망각해버린 의사들 때문에 히포크라테스는 속이 타들어간다고 합니다.
교회와 목사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누차 이야기했습니다. 의사 파업을 어찌 생각하는지요? 4일(금) 타협이 되기는 했지만, 쟁점이 뭘까요? 빈약한 공공의료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의대를 설립하겠다는 정책에 대해 의사들이 반발하는 것 아닙니까? 의사 확대가 문제가 아니라 의료시스템이 문제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야말로 골수에 사무치도록 새겨진 특권의식은 의사들의 설문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매년 전교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라는 식으로 대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내놓고도 부끄러운 걸 모른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는커녕 초보적인 이해마저 결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에서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인격체로 인간 자체와 그 인간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격입니다.
어떤 해법이 가능할까요? 의료전문인으로서 의사만이 이 사안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당사자는 병을 치료받아야 할 환자 아닙니까? 언제든 환자의 처지가 될 수는 있는 사회 구성원 모두 아닙니까? 특히 위급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 사회 구성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당사자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 당사자의 의견을 먼저 듣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공공의료 체계를 확충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그 상황을 헤아린 끝에 나온 대안입니다. 만약 지금 그 일을 추진하는 데 더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면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함께 해법을 찾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사안은 결코 의사들만의 의견으로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공통의 과제라는 인식이 절실합니다.

우리 사회가 갈등의 해법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은 무려 7년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법외 노조로 배제되었던 전교조가 엊그제야(9/3) 대법원 판결로 정당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노동3권을 보장하는 헌법의 정신은 물론 노동조합법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행정부처의 시행령에 의해,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가입되어 있는 노조는 인정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니, 노동조합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해고되어 노동자의 지위를 잃은 사람이 해당 노조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라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얼토당토 않는 일이 우리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부당한 정치권력이 사법부와 거래를 통해 부당한 행정조치를 취한 것이 이제야 비로소 바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뒤늦은 대법원의 판결을 반기지만,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을 바로 잡는 데 그 많은 시간과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현실이 통탄스럽습니다.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더 답답해집니다. 14년 넘도록 온갖 궤변으로 차별금지법을 저지하는 교회, 생명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소중한 것만 고집하는 교회를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다르다고 할지언정 더더욱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위기에 처한 생명, 위험에 빠진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일까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그리스도, 바로 그에 기초할 때만이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무엇보다 이해당사자의 형편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하여, 공동체 전체에 덕을 세우는 방안으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본분이 여기에 있거늘, 거꾸로 기득권의 질서에 편승하여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상처를 안기는 역할을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그렇게 선취한 그 삶으로 우리의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그의 나라 온 땅에”(살림의 노래 30)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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