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이 먼저다 - 마가복음 2:23~28[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0-25 17:35
조회
8998
2020년 10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이 먼저다
본문: 마가복음 2:23~28



오늘 우리들에게 안식일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은 정확하게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 해당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한 주간 가운데서 특정한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의무감으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한 안식에 대한 기대감, 다시 말해 어쩌면 전투와 같은 일상에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삶을 누리기 위한 용기와 희망 같은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마 올해 들어 코로나19 위기로 주일에 함께 모이지 못한 기간이 길어 새삼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늘 이 시간 그 물음을 안고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걸어가셨습니다. 그 일행은 퍽이나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답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옛날 다윗 왕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의 눈길을 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적이 있습니다.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은 어디서 먹을 것을 변변하게 챙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제사장을 만나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제사장 이름이 아비아달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아히멜렉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그것을 다윗과 그 일행에게 건네주어 그들을 위급한 굶주림의 사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그 옛 이야기를 환기시키며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그 옛 이야기 자체로 이미 하실 말씀을 다 하신 셈이지만, 더욱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목숨,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삶 또는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뿐이지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객전도, 곧 삶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신성시하는 안식일마저도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 아닙니까? 똑똑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진실을 몰랐을까요? 인간이 참 현명한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인간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과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과는 상반되는 현실적 조건들에 집착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욕망, 그것이 설령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할 경우 그 욕망을 보장하는 체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진실과 멀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는데, 사실상 그 율법을 지배한 사람들은 그 뜻을 전도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정해진 질서이자 체제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을 생활화하고자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는지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당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무려 234 가지였습니다. 완전한 숫자 4와 10이 결합된 40에서 하나를 빼면 불완전한 39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또 다른 완전한 숫자 7에서 1을 빼면 역시 불완전한 6이 됩니다. 이 둘 곧 39와 6을 곱하면 234가 됩니다. 불완전한 숫자들의 곱으로 금기의 목록을 확정한 것입니다(파종, 쟁기질, 수확, 단 묶는 일, 타작, 키질, 독서, 제분, 체질, 반죽, 굽는 일, 표백, 빗는 일, 채색, 잣는 일, 실을 감는 일, 엮는 일, 분리하는 일, 매듭짓는 일, 푸는 일, 시침질, 이를 위해 뜯는 일, 사냥, 도살, 가죽 벗기는 일, 소금에 절이는 일, 가죽정리, 깎아내는 일, 절단, 두 개 글자 쓰는 일, 이를 위하여 지우는 일, 건축, 무너뜨리는 일, 불 끄는 일, 점화, 망치질, 운반... 등).
이렇게 철저하게 안식일법을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밀 이삭을 자른 예수님 제자들의 행위는 안식일의 금기사항 가운데 하나인 ‘수확’에 해당합니다. 남의 밀밭에서 ‘절취’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확’을 함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지 잘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신명기 23장 25절은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취’가 아니라 ‘수확’을 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지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 그 가운데서도 안식일법의 근본정신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의 사례를 들어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환기합니다. 사실 다윗 왕의 사례는 안식일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드려진 제물은 제사장들에게 맡겨져 있는데, 그것을 다윗 왕의 일행이 먹은 것으로 제사규정에 관한 것입니다. 그 맥락이 다르지만, 안식일 법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예수님의 성서해석의 취지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성서해석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무엇일까요? 사실은 유대교의 전통에서도 그 본래 정신이 끊임없이 환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 정신을 잊어버리고 그 법을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과 동시에 삶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구약성서를 들여다보면 십계명 가운데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가 붙은 유일한 계명입니다. 왜 그렇게 강조되었을까요? 안식일 계명은 모든 계명의 정신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그 내용이 세 가지 차원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의 차원이요(1~3), 두 번째가 인간과 인간간의 차원(5~7), 세 번째가 인간과 물질(세계)과의 차원(8~10)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세 가지 모든 차원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계명은 인간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지켜야 할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안식일을 강조할 때, 어느 대목에서나 기본적으로 공통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렛날은 모든 생업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쉬라’고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아들과 딸, 종들과 가축, 그리고 식객까지도 다 쉬라고 하는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로 성서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나오는 두 본문 곧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은 그 이유를 각각 달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곧 중요한 두 가지 이유입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창조의 질서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안식은 단순한 휴식 또는 일의 중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창세기 2:3).
신명기 본문은 출애굽 사건을 환기합니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출애굽기 본문이 창조의 질서를 환기시키고 있다면, 신명기 본문은 아주 강렬한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된 안식일을 계명은, 어떤 곳에서는 더더욱 강력하게 강조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1장 12절 이하에서는,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계약의 징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 안식일의 진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곧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처럼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가 따로 없는 인간적 관계를 만드는 것을 말하며, 일그러진 창조의 질서를 본래 그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자연적 질서, 그러한 사회적 질서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이며, 그 길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구체적 징표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안식일의 근본 뜻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이 근본정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인간 삶의 태도를 일깨워줍니다. “사람이 먼저다” 그 정신을 일깨웁니다. 그것이 다른 동식물, 피조물에 앞서 사람이 우선이라는 뜻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소중함, 삶에 동반되는 여러 조건들에 앞서 삶 자체야마로 소중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경제적 효율성이라든지, 어떤 체제와 국가의 안보라든지, 어떤 사회적 제도라든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삶을 보장하는 한에서 그 조건들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현 정부는 그 정신을 내세웠습니다. 더불어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표방하였습니다. 현 정부가 내세운 적폐청산은 바로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낡은 제도와 관행을 철폐하는 과제를 함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삶을 억압하는 권력체제를 변화시켜 권력을 분산하고, 나아가 실질적인 삶의 보장을 위한 기본권을 확대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출범 3년을 넘기고 이제 2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과연 그 과제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위기라는 비상한 상황에 대응한 이른바 K-방역의 성공 외에는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생명 안전의 시금석과도 같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4년째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도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전태일 50주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 50년이 지난 지금 ‘전태일 3법’(근로기준법 개정, 노동조합법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요청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몇 가지 단적인 예를 들었을 뿐 해묵은 과제들을 열거하자면 그 목록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그 구호가 무색해지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뼈아픈 이 현실은 직시하는 것은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인권선언의 대장전입니다.
오늘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의 뜻을 되새기며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그 뜻을 구현하고자 결단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말씀의 뜻을 새기며, 진정으로 이 땅 위에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결단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