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야기의 정곡 - 룻기 1:14~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1-24 16:15
조회
325
2021년 1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야기의 정곡
본문: 룻기 1:14~18



성서 가운데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절기마다 애송되며 사랑받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다섯 두루마리로 불리는 책들로, 룻기(맥추절), 아가(유월절), 애가(예루살렘 성전 파괴일), 전도서(수장절), 에스더서(부림절)가 그 책들입니다. 룻기가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에 읽혀진 사연은 아마도 이삭 줍는 여인의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민족의 중요한 명절 때마다 읽혀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받는 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주인공으로 하는 룻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부간의 관계를 생각할 때 ‘화목’보다는 ‘갈등’을 떠올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화목한 고부의 사연을 전하는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룻의 이야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 가족 이야기입니다. 사사시대는 위기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룻의 이야기는 그와는 다른 분위기를 전합니다. 이야기는 기근과 비극적인 가족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말이 아름답습니다. 착한 주인공의 마음 씀씀이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역시 선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의 이미지와 함께 사뭇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사시대에 기근이 들어 베들레헴 출신의 한 가족이 모압 땅으로 임시 이주합니다. 그 가족은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방의 땅인 모압에서 엘리멜렉은 세상을 떠나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아들도 죽고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 과부들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으로 떠날 채비를 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되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 여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주었던 남성들이 사라졌고, 자식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돌아서면 남남이 되는 관계였습니다.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한사코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고, 이로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를 볼까요? 베들레헴에서 룻은 나오미의 부유한 친척 보아스를 만납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시는 룻을 어여쁘게 여겼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현명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단절된 남편의 가계를 보아스를 통해 복원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규범을 따라 보아스가 룻에게 청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 규범에 따라 보아스는 대가 끊긴 엘리멜렉 가족 유산을 지켜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 유산을 지킬 뿐 아니라 끊어진 가계의 대를 잇는 몫까지 감당해줄 것을 제안하였고 그 뜻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룻은 당당하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고 아들을 낳아 단절된 가계를 잇는 몫까지 감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으로 기억되었습니다.
현대적 관념으로 보면 낯설지만, 그저 한 개인으로서보다는 가족과 씨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한 당대의 관념에서 이해되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 출발 상황을 빼놓고는 어떤 대목에서도 위기가 등장하지 않고 아주 행복한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주인공들의 마음씨는 한결같이 선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당대의 가족관계 안에서 기대하는 소망을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주인공 여성들의 강한 의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감동적입니다. 비록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주인공들의 몫이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룻과 나오미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여성상과 함께 하는 여성 특유의 연대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일 룻이 친정으로 되돌아가 재혼했다면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룻 자신도 또 다른 남성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숙명적인 여인상만을 보여준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삶의 태도를 지녔고 그 결과로 충분한 보상을 누렸습니다. 마치 길 떠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변두리 인생에서 한 공동체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됩니다. 끊어진 가계를 복원함으로써 이 두 여인은 공동체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공동체에 결여된 부분을 채우는 역할까지 감당하였습니다. 이들은 남성의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도적 역할로 그 기회를 누렸습니다. 룻이 아들을 얻었을 때 그 아들이 보아스의 아들도 아니오, 룻의 남편인 말론의 아들 또는 그 아버지 엘리멜렉의 아들도 아닌 ‘나오미의 아들’로 불리워진 사실은 그 모든 과정의 주도권이 여인들에게 있었음을 말합니다. 성서의 전승은 이 여인의 몫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족보에는 이례적으로 세 여인이 등장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출애굽할 때 여리고에서 이스라엘을 도운 기생 라합,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의 주인공 룻입니다.
룻 이야기는 남성 중심의 가계를 복원한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로 또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기억한다면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하는 뜻의 절반 밖에는 깨닫지 못한 셈입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은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숨은 의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룻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은 가족주의의 틀 안에서이지만, 놀랍게도 룻 이야기는 그 가족주의를 정면으로 뒤집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 나서 삶을 개척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잃어버렸던 한 가계를 복원한 한 주인공이 바로 이방여인이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서슴없이 밝힙니다. 그 여인이 복원한 가계에서 이스라엘의 성조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나오미의 아들’로 불린 룻의 아들은 오벳이었고, 그는 이새의 아버지 곧 다윗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순수 혈통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을 재건하였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정책 가운데는 이방인과의 결혼금지도 포함되었습니다(에스 9~10장; 느헤 13:23~30). 이스라엘이 재건되었을 때 그 정책으로 일정하게 사회가 안정되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경직화되었고 그 사회 안에서 숨을 죽여야만 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룻기가 기록된 것은 그런 시대상황에서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조 다윗의 혈통이 이방여인에게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교훈으로서 의미를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서와 더불어 룻기는 그 폐쇄적인 세계관을 뒤흔들고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지향하도록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순수 혈통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자들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국부이자 민족적 정통성의 출발점으로서 다윗을 순수한 이스라엘 정신의 표상으로만 믿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룻의 이야기는 마치 가시처럼 그 순수한 믿음에 흠집을 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조상이 사실은 이방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고 밝히는 이 이야기는 편협한 혈통주의 국수주의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의 한계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의 능동적 역할, 그리고 그 역할을 감당하는 데 여성들의 친밀한 연대는 고착된 성적 역할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기존의 사회질서 안에 고착된 상식과 통념에 대항하는 전복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로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땅히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를 되돌아보게 해 줍니다.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방향을 지향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강고한 폐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차 이야기해왔기에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다시금 환기한다면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에 대한 태도,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여전히 불평등한 위계질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 말할 것 없습니다. 그 사회적 병폐가 더 극단화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진실, 룻기의 진실은 그런 우리 사회와 교회의 병폐를 다시 돌아보게 해 줍니다.

지난 주간 저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언론에 운위되고 있지만, 기성세대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방탄소년단’ 곧 BTS에 왜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한 권의 책(홍석경, )을 길잡이 삼아 읽는 가운데 몇 편의 유튜브를 살펴봤습니다. 결론은 ‘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문화 ‘산업’이 ‘제조한’ K-팝을 넘어선 스토리와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존의 K-팝의 성공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요인이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성공을 애국주의ㆍ민족주의로 전유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적 현상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들의 성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적 토양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합니다.
주변부(이 주변부는 중층적, 세계 대중문화의 주변부 한국 > 메이저급이 아닌 기획사 > 지방 출신의 구성원 등등)의 주인공들이 지닌 삶의 스토리와 그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주는 호소력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왕의 한국 문화산업의 성공과 기술적 조건에 올라탄 격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가혹한 경쟁의 세계로 내몰며 저마다 상품 가치를 지니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려운 신자유주의 사회의 격랑을 극단적으로 경험하는 한국사회에서 발신하는 주인공들의 메시지가 주는 호소력을 빼놓고는 그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에 공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의 의지를 다지는 메시지가 주는 호소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그저 팝스타에 대한 열광으로 그치지 않고, 서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아 사회적 연대 행동으로, 때로는 정치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가는 현상도 주목꺼리입니다. 그것이 엄존하는 세계질서를 바꾸는 직접적 계기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자기만의 울타리와 경계를 넘어 공통적으로 처해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서로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는 감수성을 키우는 문화적 변동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본문말씀을 통해 편협한 자기 세계를 벗어나 함께 일구는 삶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교회에서의 우리가 나누는 생각들과 경험이 그렇게 우리의 세계관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꾸로 좁은 세계에 가두는 역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옹졸합니까?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구원의 세계가 그렇게 편협한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들의 의미를 주시하고, 오히려 겸허히 우리의 몫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원동력을 부여해주는 우리의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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