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베드로후서 1: 16~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1-31 15:28
조회
800
2021년 1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본문: 베드로후서 1: 16~19



베드로후서는 신약성서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기록된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대략 2세기초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으로 보면 같은 이름으로 묶여진 베드로전서보다는 오히려 유다서와 더 긴밀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박해의 상황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베드로후서는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일종의 신앙의 회의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기록되었고,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유다서의 문제의식과 상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늦게 기록되어 성서에 편입되었다는 것이 그 말씀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달라진 상황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분투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진정성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던 소위 재림의 지연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곧바로 임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신앙으로부터 이탈해가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으로부터 이탈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처음에 가졌던 긴장과 열정이 많이 식어지고 생활 자체가 해이해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한 것이 베드로후서의 근본 동기입니다. 3:8이하에서 ‘주님께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고 하면서 어느 순간에 주께서 재림을 하시더라도 그 일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때는 양적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질적 시간(카이로스)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일상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에서 그 삶의 태도를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1:5~7) 이러한 덕목을 갖추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마침내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열거된 덕목들은 당시 헬라인들도 이상적인 덕목들로 여겼던 것들로서, 그것이 그대로 당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믿음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지켜져야 할 신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덕은 다른 모든 덕목을 포괄할 수 있는 폭넓은 개념인데, 굳이 다른 것과 병렬해서 구별될 때 그 의미는 넉넉한 마음과 행실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지식은 맹목적으로 빠질 수 있는 믿음과 미덕에 방향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편 지식은 사람을 교만에 빠트릴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교만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더불어서 진정으로 참된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그리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덕목은 사랑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끼리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만민에 대한 사랑 곧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랑으로 완결되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당대의 일반적인 덕목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 논리적 구성을 보면 ‘믿음’을 출발점으로 해서 ‘사랑’으로 끝맺음됩니다. 고린도전서 사랑의 장(13장)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관념은 초대 교부들에게서 ‘시작은 믿음이요, 그 끝은 사랑이다’라는 말로 정식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신앙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출발을 의미하며, 그 믿음으로 출발한 이들이 사랑으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여러 덕목을 갖추기 위해 애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 이 덕목들은,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사랑을 이루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내용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빈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렇게 집약됩니다. 그러니까 이미 앞서 말한 대로 어느 순간에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일상의 삶 안에서 덕목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과 동일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종말론적 기대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라고, 본문말씀은 역설합니다. 다시 줄여 말하면,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덕목을 실현해가면 어느 순간 그리스도를 다시 대면하는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진실을 말하는 베드로후서 저자의 이야기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재림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덕목을 갖추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째서 재림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그 재림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적 시간 차원에서 저절로 시간이 흘러가면 어느 순간 맞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질적 시간의 차원에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마땅히 그 사건은 체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 질적인 변화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생애 기간 동안 체험한 두 가지 사건을 환기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과 변화산상에서의 변모 사건을 환기합니다. 그 때 모두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세례 받을 때 들려 온 음성입니다. 변화산상에서도 그와 다르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의문이 들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이를 두고 많은 신학적 사변과 논쟁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그 장황한 신학적 사변을 이 시간 펼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이 사람들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는 것만 확인할 따름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 체험했던 것과 같은 그 순간을, 당대의 사람들 역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재림’이라는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상의 경험과는 다른 특별한 사건을 뜻합니다. 여전히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고 사람들의 도덕적 성화와 관련하여 역설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삶 가운데서 사랑으로 완성되는 그 삶을 꾸준히 살아갈 때에 마침내 불현 듯 그 놀라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기간 그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있지만, 또한 그보다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그 예언의 말씀 또한 그 구원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그렇게 희망을 갖고 나아가면 마침내 ‘마음속에서 샛별이 떠오르고 날이 새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입니다. 이 표현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물론 베드로후서는 그 놀라운 사건을 개인의 도덕적 성화와 내면적 체험의 세계로 좁혀 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이 매우 다양한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동기와 체험을 빼놓고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그 의의를 새길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심드렁해진 사람들에게 새삼 그 신앙의 의미, 인간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따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삶이 소중하다면 그 삶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묻도록 하여,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정말 해야 할 바를 다하면 마침내 그 열매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째서 신앙의 의미, 삶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고 심드렁해지는 것일까요? 신앙을 갖는 순간 모든 것이 일거에 변화하고, 삶의 매순간이 놀라운 일로 가득해야 한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너무나 역동적이고 너무나 자극적인 한국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대가 더욱 클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 처지를 보면 그렇게 놀랍고 역동적인 일들을 체험하기보다는 정반대로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더 커다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삶의 의지를 꺾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을 일깨웁니다. 삶은 매순간 반짝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는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 곳에 희미한 빛이라도 보이는 듯하면 다행입니다. 오늘 말씀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빛을 찾아 나서고, 다행스럽게 빛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면 마침내 그 빛 가운데 자신이 환히 드러나는 순간, 곧 ‘마음속에서 샛별이 떠오르고 날이 새는’ 그 순간까지 정진하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렇게 마침내 반짝이는 삶은 일상의 여일한 삶의 과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저마다에게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오늘 말씀은 그 의미를 새기고, 갈고 닦는 것 자체가 신앙의 여정이요, 삶의 여정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과정에 충실했을 때 빛나는 열매를 누린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진실입니다. 교회는 그 여정을 서로 돕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따라, 신앙의 여정, 삶의 여정에서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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