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을 본받는 삶 - 에베소서 5: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3-07 17:20
조회
457
2021년 3월 7(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을 본받는 삶
본문: 에베소서 5:1~9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후대의 교회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교회가 점차 제도화되어 가는 국면에서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앞선 4장의 후반부에서 말한 구체적인 생활규범을 유념하면서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집약하여 설명하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절). 여기에 덧붙여 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2절)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8절)을 말합니다. 본문을 따라가며 말씀의 뜻을 새겨보겠습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대전제가 되는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을 본받는다(imitatio Dei)는 표현은 딱 이 대목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친서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신을 닮으라고는 했어도(고전 11:1; 4:16; 살전 1:6; 빌립 3:17 등) 하나님을 닮으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관념에서는 어떨까요?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성서의 표현 자체로 보면 여기서 비로소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실을 이념(이데아)의 모방으로 간주했던 세계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그리스 철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에베소서는 이를 철저하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변용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성서 자체가 당대 세계와 소통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더 장황한 사변은 자제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철저히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점만 여기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로 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의 모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성서의 신앙관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제의적인 용어들 때문에 언뜻 보기에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비로소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산 제물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워버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좀 의아합니다. 사랑의 삶을 역설하였다면 이어지는 내용은 그 사랑의 삶을 구체화하는 생활규범이 제시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의 다른 데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것으로 구체화되었으면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말씀의 바로 앞 대목(4:25~32)에서는 최소한 권장하는 덕목과 금지하는 패덕을 대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금지하는 패덕의 목록만 여섯 가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음행, 더러운 행위, 탐욕(3절),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4절)입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미덕과 패덕의 목록은 사실 단어 그 자체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지 딱 꼬집어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패덕의 목록이 그렇습니다. 권장되는 미덕은 일반 철학과 윤리사상에서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반면 패덕의 목록은 딱 꼬집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많은 용례를 비교하고서야 비로소 비슷하게 짐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말한다면, 3절의 세 가지 패덕 가운데 음행은 대체로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더러운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부정행위를, 탐욕은 주로 물질에 대한 집착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 4절의 세 가지 패덕은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기고, 관계를 훼손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유머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상처를 안기고 관계를 훼손하는 말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의문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자면,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구체화하는 생활규범을 말해야 하는 대목에서 적극적인 미덕을 말하지 않고 금기시해야 할 부정적인 패덕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역시 에베소서의 보수성,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가 제도화되어가는 국면에서의 공동체 윤리의 보수성을 드러내주는 한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윤리 대신에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윤리에 대한 강조로 전환한 한 단면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꼭 그렇게 폄하해야 할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은 여러 결을 갖고 있고, 그것은 또한 사람의 삶 자체가 여러 결을 갖고 있는 것에 상응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말씀이 금지하고 있는 패덕의 목록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밑바탕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선행을 행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마음의 밑바탕, 태도의 근본동기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권면인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수행이라고 할까요? 자기 안에 도사린 마성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 어떤 욕망이든 자기욕심에 탐닉하거나, 구체적인 개별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기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의 삶을 펼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선행이 일종의 자기과시적 행위가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숭배자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5절).
언뜻 보기에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방인들, 이교도들을 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편협한 해석입니다. 음행, 부정한 행위, 탐욕 그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우상숭배 행위가 될까요? 그것은 자기욕망에의 몰입이요 탐닉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욕망이 절대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이 자리할 틈도 하나님이 자리할 틈도 없으니, 그것은 곧 우상숭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은 6절 이하에서, 그와 같이 잘못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권합니다. 이 말씀은, 그저 일반적 교훈으로서 빛의 역할을 상기하기보다는 보다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주의 빛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의 실상을 온전하게 파악함으로써 진정으로 주의 빛 가운데서 진리와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어둠과 빛을 대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어둠이었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빛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빛으로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금지되어야 할 패덕에 그치지 않고 권장되어야 할 덕목이 비로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으로 구체적 덕목들을 말하고 있는데(갈라 5:22), 빛의 열매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훨씬 실감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빛의 열매로서 선과 의와 진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구체적 덕목입니다. 그 열매는 구약성서 예언자 미가의 선포에 그대로 상응합니다.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사랑을 행하는 일,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8) 바로 이 말씀에 그대로 상응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말씀에서 ‘선’은 이웃에 대해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하며, ‘의’는 올바름을 말하며, ‘진실’은 그 두 가지 덕목을 완성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베소서가 반영하고 있는 초기교회가 비록 제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정신에서 후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확인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와 같이 사랑을 이루는 삶으로써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대강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부차적인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 삶을 강조하는 데서 넘어서야 할 패덕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숭배자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서신이 기록된 당대보다 오히려 오늘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제단 앞에서 예를 갖추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더욱 심각한 우상숭배는 물질에 대한 탐욕, 자기욕망의 절대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자기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마다 자기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마다의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적극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종의 위험한 함정에 빠져 있는 오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실체가 저마다 소중하기에 서로 존중하는 사회적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이기보다는, 자기세계에만 몰입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욕망에 포로된 삶, 그것은 사실상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더 거대한 자본의 탐욕에 의해 지배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꿈은 갖지 마라, 그저 주어진 세계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라. 그것이 행복이다’라는 잘못된 세계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자신과 다른 존재는 부정하며 배제합니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목숨을 끊어야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사태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말씀은 자기만의 세계에 탐닉하는 삶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역설하고 있는 패덕의 극복은 타인을 진정으로 정당하게 인정하며, 그들에게 상처를 안기지 않는 삶이야말로 사랑을 이뤄가는 밑바탕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말씀의 진실을 다시금 새기며, 우리의 교회가 그 말씀을 진실을 이루어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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