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믿음의 증거 - 히브리서 11: 1~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3-28 13:43
조회
354
2021년 3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믿음의 증거
본문: 히브리서 11: 1~3



본문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개역의 표현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고 누구나 쉽사리 외울 만큼 익숙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새삼 무슨 해석을 덧붙여야 할까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명해 보이는 이 말씀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칫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맹목적 믿음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이 믿음은, 싸구려 맹신주의, 독단주의를 강화하는 역할만 합니다. 본문말씀이 선포하는 믿음은 그런 잘못된 믿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히브리서 11장은 초대교회의 세례자 교육시 자주 읽혔던 신앙적 교훈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에 앞서는, 보다 시원적이고 보편적인 믿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동일시되지만, 본문말씀은 그 믿음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믿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역설하는 믿음은 율법을 따르는 행위에 대립되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시원적인 믿음입니다. 모든 일의 출발점이 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원동력이 되는 것으로 언제나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장 3절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봅시다”라고 한 점에서도 분명해집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은, 우리의 믿음생활,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도(正道)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고유한 신앙생활은,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일반적인 사회생활에서의 믿음을 갖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에 대한 확신, 사람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나 그저 주관적인 확신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확신’으로 번역된 말은, 옛 번역본들에서처럼 ‘실상’ 또는 ‘보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이뤄주는 근거요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구절이 사실상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듯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됩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감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상식적 통념으로 미처 인식되지 않지만,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인정이 믿음이 됩니다. 쉽게 말해 지금 보이지 않지만 사물의 이치를 헤아려 볼 때 장차 이렇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나아가는 태도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자 동시에 그 이치 안에서 마땅히 지향해야 할 삶의 정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믿음은 드러나지 않은 사물들의 드러남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봄이요, 어두운 것의 밝아짐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함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의 나타남이다.”

오늘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새번역이 매끄럽게 번역하였지만, 개역은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증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안목에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확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절 이하에서는 바로 그 믿음의 증인들로서 선조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마지막 3절에서 다시 첫 구절과 같은 내용을 하나의 예를 들어 보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은 지금 감각적으로 경험한 그 현상 자체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오묘한 세상, 이 오묘한 생명현상을 볼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내재된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상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 보이고 인식되는 범위를 넘어서 있는 어떤 원인의 결과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통찰은 어떤 철학적 사색과도 통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본질과 형상의 관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그것을 유념하면서 말했다면, 당대의 정신세계와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하나의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 세상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출발점으로서 믿음을 말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믿음으로 장차 맛보게 될 세계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주어져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행하고 생각하는 것을 쉽게 상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지금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지금 드러나 있는 것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바라는 것이요, 희망입니다. 믿음은 사물의 이치를 깊이 새기는 가운데 바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요, 그것을 맛보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의 선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마땅히 그런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단지 지적 승인의 차원이 아닌 의지와 실천의 차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욱이 11장 마지막 절(39~40절)은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마감합니다. “이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끊이지 않는 믿음의 역사, 끊이지 않는 희망의 역사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시점에 있는 당대 사람들의 사명을 일깨웁니다.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지금 당대의 사람들이 희망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순간도 끊겨서는 안 될 믿음의 역사, 희망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히브리서는 비로소 12장에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적은 없습니다.” 좀 섬뜩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기까지 그 믿음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셨는데, 그걸 생각하면 믿음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쉽게 지칠 수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말씀이 지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숱한 신앙의 조상들이 보여주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셨던 믿음의 본보기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주어진 현상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고 그 가운데서 감당할 수 있는 몫을 깨닫고 그렇게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믿음은 우주적 생명의 질서에 역행하지 않고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를 두고 한탄하셨습니다(마태 17:17; 마가 9:19; 누가 9:41).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리는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를 보고, 다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누가 19:42).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종교적 의례에 감춰진 피눈물 나는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한 당시 세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이 처해 있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참 삶을 누리게 하고자 한 예수의 믿음은 그렇게 타락한 권력을 거부하는 행위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에 믿음이 있을까요? 기후위기, 경제위기가 운위된 지 오래 되었고, 코로나19로 전 세계적으로 삶의 위기가 가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위기로부터 세계를 구하려는 믿음과 연대의 노력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국제적 협력의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각자도생의 길만이 오히려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촛불 민의에 의해 민주주의의 건강함을 자랑했던 우리사회도 실망과 낙심의 탄식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삶이 무너져 극한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늘어가지만, 속시원한 해법 하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과잉되어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지 의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보다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골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 오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믿음을, 신뢰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세계를 향하여, 이런 세계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선포합니다. 인간이 진정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은 바 그대로 실현하라고 촉구합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곧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그 믿음대로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 선포에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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