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폭력의 종말, 하나님의 정의 - 사사기 9:53~57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4-01 15:50
조회
11443
2021년 4월 1일(일) 오후 2:00 한신대학교 민중신학회 고난받는 미얀마 민중을 위한 고난주간 기도회
제목: 폭력의 종말, 하나님의 정의
본문: 사사기 9:53~57

미얀마사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2월 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저항이 지속되고 있고, 무려 52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구금자가 2,500명을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무차별 살상이 벌어지고, 구금된 이들에게도 가혹행위는 물론 살해마저 행해지고 있습니다. 내전이 염려되지만, 내전이 아닌 평화적 시위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정당성 없는 군부 쿠데타와 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고통을 겪는 미얀마 민중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 세기 제국주의의 지배 역사 이래 미얀마 역사는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미얀마 국내의 민족적ㆍ정치적 세력이 복잡하고, 이를 둘러싼 국제적 역학관계 또한 복잡합니다. 이념적 갈등도 존재합니다. 또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에 기원을 둔 군부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서 어떤 정당성을 ‘지녔었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민중의 염원을 배반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군부 쿠데타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잔혹하게 진압ㆍ학살하고 있는 군부의 만행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그 참담한 현실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그 어떤 신중함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에 맞서 절박하게 호소하고 저항하며, 또한 더불어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단호한 행동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자명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무고한 생명을 짓밟는 권력, 민의를 저버린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민중의 심판을 받고 하늘의 심판을 받는다는 진실입니다. 인류의 보편적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이며, 바로 이 땅에서 41년 전에 일어난 광주항쟁의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입니다.

성서 또한 그 진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히브리 민중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든 섬길 수 없다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경우이든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믿음으로, 누구나 하나님 안에서 동등한 형제자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자신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방된 백성으로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히브리 민중들에게 때때로 위기가 닥쳤습니다. 끊임없는 외적으로부터의 위협이었습니다. 그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를 세워 위기로부터 백성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사사들이 섬기던 시대의 역사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맡았습니다. 위대한 사사 기드온이 그 역할을 맡았을 때,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고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때 기드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릴 것입니다.”(사사 8:23)
그러나 위기는 때로 내부로부터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 믿음을 저버리고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참람하게도 그 권력의 욕망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는 도구로 활용하였습니다. 마치 과거 역사에서의 한 정당성에 기대고자 한 미얀마 군부의 권력야욕과 같다고 할까요?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들 일흔 명을 무참히 학살하며 권력의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요담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치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유명한 요담의 우화입니다. 숲속의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세우고자 했을 때, 쓸모있는 나무들은 모두 사양하는데 반해 가시나무만이 그 요구에 응해 결국 숲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우화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주는 경고였습니다.
3년 동안 자신의 세상이 온 것으로 착각하였던 패도한 권력자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부셔져 죽음에 이릅니다. ‘여인의 맷돌에 죽은 최고권력자’, 성서의 이 증언은 의미심장합니다. 성서는 늘 이렇게 극적인 진실을 우리에게 환기해 줍니다. 권력과는 거리가 먼 여인, 게다가 무기와는 전혀 상관없고 일상의 살림살이를 돕는 맷돌은 민중들의 일상적인 힘, 생명을 살리는 힘을 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도구에 의해 무도한 권력의 야욕이 무너지고 권력자가 파멸에 이르렀다는 증언입니다. 폭력의 종말, 곧 하나님의 정의의 구현입니다.

우리는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결코 먼 나라의 일로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미얀마의 형제자매들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지금 미얀마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역사의 기억을 우리 스스로 뼈저리게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미얀마 민중들을 위한 기도회를 바로 이 자리 류동운 열사 추모비 앞에서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41년 전 광주를 우리가 지금 다시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00여년의 기나긴 민중의 항쟁을 통해 오늘의 민주공화국에 이르렀습니다. 최근의 역사만 환기하더라도 41년 전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민주화항쟁, 2016년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미얀마 민중의 항쟁의 역사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역시 가까운 시기만을 환기하더라도 1988년 이른바 8888항쟁, 그리고 2007년 사프란항쟁, 그리고 2020년 총선에 이은 2021년 오늘의 항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미얀마의 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과 가장 닮아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살육의 참극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하루하루 악화되어가는 사태 가운데서 또 얼마나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겪고 있지만, 1980년 광주에서 겪었던 그 참담한 비극의 소식에 다시 또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1980년 광주가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성금요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1980년 한국의 광주는 마치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와도 같았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은 부활의 사건으로 반전되었습니다. 1980년 광주는 이후 도도한 민중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존의 항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 사건의 뜻을 기리는 것은 지금도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2021년 미얀마 민중들의 항쟁이 그와 같이 기필코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견디기 어려운 비극으로 경험되고 있지만,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의지요 희망이며, 그 어떤 권력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얀마의 모든 사람들이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흘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그 날까지 함께 하며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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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