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 누가복음 19:37~4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5-02 13:51
조회
12633
2021년 5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본문: 누가복음 19:37~40



오늘 본문말씀은 네 복음서가 모두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큰 뜻에서 일치하고 그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일치하고 있는 점을 확인해볼까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반겼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누가복음의 오늘 본문말씀을 처음 마주하기에 앞서 세 복음서의 병행본문(마 21:1~11; 막 11:1~11; 요 12:12~19)의 의미를 새긴 적이 있습니다. 그 요체는 평화의 왕에 대한 민중들의 환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이미 그분의 삶 자체를 통해 확인된 진실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를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그 의미는 일종의 상징적인 퍼포먼스와 같은 형태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 스가랴서(9:9)에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당대의 귀족들이 타는 말이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친숙한 동물입니다. 민중들이 짐을 나르거나 이동할 때 가장 애용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권위 또는 위엄과는 상관없고, 일상의 삶 자체를 상징합니다. 온순하고 친근한 동물로서 민중들의 일상의 삶을 함께 하는 동물이었습니다. 바로 그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삶을 압축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평화의 왕의 모습입니다. 권력으로 제압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민중들의 일상적 삶 가운데서 섬김으로써 이루는 평화를 그렇게 다시 한 번 극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비장하다는 의미에서 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암만 봐도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아주 친근한 장면입니다. 네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인 누가복음의 해당 본문은 다른 세 복음서가 전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대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 앞서 제자들이 환호합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19:38) 이를 보는 순간 뭔가 비슷한 구절을 곧바로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의 찬양입니다.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2:14)
누가는 의도적으로 유사한 찬양구로 탄생과 생애의 의미를 집약합니다. 만천하에 당신의 삶이 뜻하는 바를 드러내는 정점에 이른 순간에 누가는 탄생의 의미로 부여했던 그 내용을 다시 환기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방향은 달라졌습니다. 2장에서 천사들의 노래는 하늘의 영광이 땅 위에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말씀에서 제자들의 환호는 땅 위에서 예수님이 이룬 삶의 평화가 하늘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탄생의 뜻이 삶 자체로 구현되었다는 것을 누가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그 환호가 이어진 다음 뜻밖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서 말합니다. 대화의 분위기로 보아 이 대목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딱히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 바리새파 사람들과 식사를 종종 나눴습니다(7:36; 11:37; 13:31~33; 14:1). 그만큼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색하며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 내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고,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도무지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집니다.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의 요청은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요? 제자들의 환호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의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까봐 걱정해서 한 소리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어떤 의미에서든 왕으로 떠받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는 자신들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딱 꼬집어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으로부터 중요한 지혜를 깨우치고 따라서 존경받을 만한 선생님이라고는 생각했겠지만 감히 왕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제자들의 환호성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제법 현명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의 세계 안에서 그저 예수님의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미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환호성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은 그런 맥락에서 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할 말을 하고 있다. 말 못할 까닭이 없다. 만약 저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제자들이 해야 할 소리, 할 수 있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제지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는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 그 뜻이 자명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마땅히 말해야 할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뜻밖의 사람, 심지어는 미물을 통해서라도 그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통상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이 말씀을 관용적으로 사용할 때도 그런 뜻을 유념합니다. 매우 시적인 은유라고 할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그 뜻이 하나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용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었을 때 아이들이 ‘호산나!’ 외치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화를 내자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시 118:26)는 말씀으로 응수합니다(마태 21:16).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어떤 특정한 사태를 유념하고 말했다면 조금 달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문맥이 중요한데, 사실 이 문맥은 매우 긴장감이 감도는 문맥입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 앞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열 므나의 비유’(19:11~21)가 등장합니다. 많이 곡해되고 있는 비유이지만, 사실 그 비유는 포악한 권력자 헤롯대왕의 첫 아들 헤롯 아켈라오스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아기 시절 분봉왕으로서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고, 그 정치적 반대자들을 3,000명이나 처형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왕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19: 28)면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예루살렘 도성을 보면서 우시는 장면이고, 이어 성전을 정화한 사건이 이어집니다. 폭력으로 지배하며 민중의 고혈을 짜내서 세운 도성과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그 맥락에서 보면, 그 웅장했던 성벽과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허망하게 나뒹구는 돌들을 보게 될 때야 비로소 진실을 알아차리겠느냐 하는 의미를 함축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사건이 일어난 주후 70년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게다가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하는 표현은 구약 예언서 하박국에서 등장하고 있고, 그 맥락 또한 심각합니다. “담에서 돌들이 부르짖으면 집에서 들보가 대답할 것이다.”(합 2:11) 하박국의 이 예언은 자신들의 집안을 부유하게 할 목적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높은 곳에 좋은 집을 짓고 사는 지도자들을 질책하는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민중의 고혈이 배인 그 집이 울부짖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누가복음의 기록자가 이렇게 긴장된 맥락 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심각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을 포함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만큼 심각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줄이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그 말이 함축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배제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누가복음의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태를 유념하고 하신 말씀이라면 그 말씀의 극적인 성격은 더욱 도드라집니다. ‘그런 파국에 이르러서야 알겠느냐? 그 파국에 이르기 전에 진실을 깨우치고 외치는 제자들을 나무라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 오히려 뭘 잘 안다는 너희들이 문제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내용상 대비의 초점은 진정한 삶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며 폭력으로 침묵의 평화를 유지하는 권력체제가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맥락에서 새기면 진정으로 생명을 보장하는 길, 삶다운 삶을 보장하는 길과, 맘몬의 위력에 내맡긴 채 그것이 보장해주는 삶에 안위하며 사는 길,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는 그 삶의 차이를 분명히 깨달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또한 지구의 온도가 치솟한 심각한 기후위기가 초래되고 있는 데도 아직 모르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더 죽어야 알고, 삶의 터전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야 알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본문말씀의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적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그래도 예수님을 웬만큼 잘 알고 있고 가까이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씀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태를 접하면서 자기 식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 사태의 진실, 그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편견은 놀랍도록 큰 힘을 발휘합니다. 부단히 자기를 성찰하고, 부단히 안목을 열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자기세계에 갇혀 진실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 그 길이, 그 삶이 어째서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의 도가 되는지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주술이 아닙니다. 신앙은 진정한 각성을 동반한 삶입니다. 돌들이 소리칠 때야 비로소 화들짝 놀랄 만큼, 우리의 능력은 미약하지 않습니다. 파국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진실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고 또한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진실을 조금 더 가까이 깨닫고, 그 길을 신실하게 따름으로서, 저마다 삶의 평화를 누리고,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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