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의 샘물, 역사의 샘물 - 요한복음 7:37~3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5-16 15:32
조회
12705
2021년 5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생명의 샘물, 역사의 샘물
본문: 요한복음 7:37~39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갈증으로 애 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물이 귀했던 탓에 물은 삶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샘물을 두고 경탄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창 26:22) 우물은 삶의 터전에서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두려웠던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에게도 물은 언제나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말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왔느냐? 자식들과 집짐승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 17:3)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어 그 백성의 갈증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서는 곳곳에서 생명의 샘물과 생명의 물을 구원의 표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중요한 명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에 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오순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 그 명절이 어떤 명절이라고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물의 예식을 동반한 묘사를 통해 초막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막절은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기입니다. 포도원에 초막을 쳐놓고 연일 포도와 과일을 추수했던 데서 이 명절의 이름이 유래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명절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절기로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일주일간 계속되는 이 명절 기간중에 행한 독특한 의식 가운데 하나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성전에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일종의 물의 축제였습니다. 그것은 추수가 끝난 바로 그 절기 직후부터 우기가 시작되는 팔레스타인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기 곧 겨울에 충분한 비가 내려야 밀과 보리가 잘 자랄 뿐 아니라, 포도와 그 밖의 과일 농사도 풍작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을 긷는 의식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기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종의 기우제인 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의식의 의미 역시 역사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바로 광야생활에서 목말라했던 조상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던 그 우물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로 바꿔 이해한 것입니다. 한 해의 농사와 살림살이, 아니 삶 자체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기원이요 동시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성서가 전하는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자연적 순환 현상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연적 순리를 역사적 순리로 전환시켜 이해했다고 할까요? 초막절은 분명히 농경축제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앙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가나안 지역에서 행해졌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역사적 기억을 결부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은, 자연의 순리에서 역사의 순리를 터득하고 인간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도의 윤리적 성격을 띤 신앙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자연의 순환 현상을 보며 그저 경외감만을 갖고 있을 때 많은 경우 자연의 순환은 그 자체로 맹목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바알 종교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현상을 인간의 역사적 경험, 역사적 사건과 결합시켜 이해하는 태도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던 구원의 사건과 결합된 물의 의미는, 인간의 삶의 태도를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주술을 통해 그저 물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라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물과 같은 인간의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찾아나서는 태도로의 전환입니다.

그 의미를 기리는 초막절 축제의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날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스스로 생명의 물이 된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의 물을 마신 사람 또한 생명의 물을 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물은 예수의 삶으로 역사화됩니다.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으로 역사화됩니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가 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순전히 육체적인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영양소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양식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인간의 삶에 기쁨을 주는 포도주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물이 되신다고 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와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끼치는 영향을 말합니다.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신다는 것은 그 삶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 물을 마신 사람이 그 배로부터 생수를 강물처럼 흘러내리게 할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다른 모든 생명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배’는 인격을 상징합니다. 그의 인격으로, 삶으로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끼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샘물이 되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생명의 샘물이 된다는 것은 도마복음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도 그와 같이 되어,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도마 108)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곧 예수와 같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혹은 깨달음의 상호성입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차원을 함축합니다. 동격과 일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의 이치가 제대로 보이리라는 것을 도마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훨씬 심화시키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서는 우리에게 매우 급진적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에 이르지 않았고, 따라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으셔서 사람들이 그 경지를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장차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삶의 이치를 헤아림으로써 인간의 책임과 사명을 깨닫는 것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 의식의 고양을 뜻하고 더불어 더 나은 인간의 삶, 온 생명의 삶을 구현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각기 고유한 인격으로 생명의 샘물과 같은 삶을 구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삶은 단지 인격적 수양과 훈련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더불어 그 안에서 각자의 몫을 찾는 과정을 동반합니다.

오늘 우리는 광주민중항쟁 41주년을 맞이합니다. 그 사건은 맥맥이 이어지는 민주화의 물줄기 가운데 크게 용솟음친 하나의 샘물입니다. 그 사건은 그저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어떤 압제이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폭력에 맞서 스스로의 삶과 존엄성을 지키고 그 삶을 가능케 하는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거룩하고 숭고한 정신의 발로입니다. 또한 그 항쟁의 과정에서 보인 사람들의 하나 된 모습은 인간으로서의 길,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는 물론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워준 위대한 정신사의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정표입니다. 그것은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가깝게는 촛불항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원천인 동시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사건은 1980년 5월에 비로소 솟아난 샘물이 아니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사건, 그리고 곳곳에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독재체제에 맞서 일어났던 민중운동, 1961년 4.19혁명, 1919년 3.1혁명의 물줄기와 원천을 갖고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894년 동학혁명의 가장 깊은 샘물의 연원을 갖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 하는 진실을 깨달은 데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민중운동의 물줄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 가운데, 사람들 가운데서 하늘을 보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의 결정체였습니다. 우리 역사의 질곡의 순간에 역설적으로 빛난 정신의 불꽃이었고, 생명사상의 원천이었습니다.
지난 주간 5월 12일 동학127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있다기에 조용히 참석하였는데, 예정에 없이 격려사를 맡겨주어 몇 말씀을 나눴습니다. 서구의 형이상학을 걷어내고 보면 성서의 가르침과 동학의 정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전통적인 도학(道學)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천주(하느님)와 씨름해야 했던 수운은 서학에 가리어진 진실을 꿰뚫어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얼치기 도사의 망상이 아닌 것은 그 깨달음으로 세상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과 운동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정신의 탄생이 지니는 역설의 진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41년 전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에 맞았던 비극적 사건이 갖는 역설의 진실은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가장 암울한 역사의 한 굴곡지점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이 배태된 역설의 진실은, 그 의미를 새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도약의 원점이 되어 왔습니다. 풍요의 계절에 쓰라린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고 그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마땅한 삶의 태도를 깨우친 진실, 오늘 성서 본문말씀이 갖는 역설의 진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볼 때 잊어버리면 잊혀질 수도 있는 비극적 사건을 우리가 굳이 환기하며 그 의미를 새기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진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사건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생명의 샘물, 그 원천을 찾아 나서고자 하기 때문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 생명의 샘물로서 몫을 다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생명의 샘물을 맛보고,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생명의 샘물이 되어 세상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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