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지배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성령의 능력 - 창세기 11: 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5-23 17:31
조회
13453
2021년 5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지배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성령의 능력
본문: 창세기 11: 1~9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의 기원이 되는 절기로 지키는, 오순절입니다. 교회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겠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그 기원으로 보는 것은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오늘 또 하나의 병행본문으로 주어진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의 말씀은 그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언어사건, 다시 말해 언어소통의 사건입니다.
도처에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이 그 모인 자리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갈릴리 사람들이었던 사도들이 하는 말이 그곳에 모인 여러 다른 출신지역의 언어들로 들렸습니다.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 사람, 유대 사람, 갑바도기아 사람, 본도 사람, 아시아 사람, 브루기아 사람, 밤빌리아 사람, 이집트 사람, 구레네 사람, 리비아 사람, 로마 사람, 크레타 사람, 아라비아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기 다른 지역에 살면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저마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성령강림사건의 요체입니다. 그것은 출신과 지역에 따른 다양한 정체성에 상관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이루는 데 문제없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아가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 가난한 민중들의 언어가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공감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양한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이 서로를 가르고 차별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존재와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이뤄지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을 뛰어넘는 사건, 그것도 가장 낮은 민중들의 현실에 공감하며 하나가 된 사건이 성령강림사건의 요체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말씀은 그와 상반되는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가 어떻게 소통 불가능한 다양한 언어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 소통하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인류가 어떻게 분열을 겪게 되었는지 통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창세기 원역사의 결론으로서 이른바 바벨탑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역사는 검증 불가능한 신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인간문명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선악과를 범한 이후 실낙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가인과 아벨의 형제살해 이야기, 온 인류의 타락과 홍수 이야기,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 해당하는 바벨탑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심각성을 띠고 있는데, 가인과 아벨 이야기나 홍수 이야기에서는 심판과 동시에 구원의 희망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그 자체로는 구원의 희망이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문명에 대한 심각한 진단을 함축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국에 이은 진정한 구원의 드라마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그 시작이며,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강림사건 이야기가 그 대단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곧 바벨탑 이야기의 요체를 돌아볼까요? 본래 ‘신의 문’을 뜻함과 동시에 ‘바빌론’을 지칭하는 ‘바벨’은, ‘혼란’을 뜻하는 ‘발랄’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쌓은 탑을 ‘바벨’이라 하고 거기에서부터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성서 기자의 말장난(아재개그^^)은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비판적 성격을 드러내줍니다. 인간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그 문명의 밑바탕의 동기를 이루고 있는 부정적인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로서, 바벨탑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겉으로 드러난 본문말씀의 줄거리는 수많은 민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흩어져 살게 된 원인을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른바 원인론(原因論)적 설화의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속뜻은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와는 다른 훨씬 깊은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자주 접하는 이런 이야기를 대할 때 그 표피적 의미에만 주목하게 되면 그 심층적 의미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표피적 의미가 아니라 심층적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심층적 의미에 접근하고자 할 때 그 중요한 기본성격은, 이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시문명 내지는 인위적인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상징적 소재가 바벨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추정해볼 때 고대근동 문명의 중심지인 바빌론을 향한 고대인들의 시선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서양 속담 가운데 “하나님은 시골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새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 인위적인 문명의 특징이 무얼까요? 오늘 본문말씀에 담긴 두 가지 초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인위적인 규격화입니다. ‘네모난 세상’이라고 할까요? 모든 것이 직선과 네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로도, 건물도, 집도, 방도, 교실도, 책상도, 차도, 그 기본형을 그리자면 직선과 네모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본래 자연은 그렇게 네모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직선과 네모는, 인간의 편의에 따른 인위적인 획일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와 같은 규격화는 인간 삶의 편의를 획기적으로 높여준 점이 없지 않으나 그로 인해 상실되고 파괴된 것 또한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았다는 것은 바로 그 인위적인 조작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문명의 특성을 말해 줍니다.
창세기 4:17이하는 가인의 후예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성을 쌓고 가축을 기르고, 구리와 쇠를 다루어 온갖 기구를 만든 인간문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문맥에서는 그 사실을 딱히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와 달리 명백히 비판적인 시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문명이 지니는 어떤 위험성이 명백히 감지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획일적인 규격화가 편의성을 넘어 위험성을 지니는 현실에 통찰입니다. 그것은 공간의 형태가 인위적이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그것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인위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사회질서까지도 인위적이고 규격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까지도 그와 같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해서 일사분란하게 정해진 자리에서, 서열에 따라 맡겨진 일을 보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차편을 이용해 들어오고 나가는 생활이 되풀이됩니다. 한마디로 획일적인 규격, 다른 말로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 도시의 일상입니다. 인위적인 시공간의 압축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본문말씀의 두 번째 초점이요, 심층의 진정한 초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도시문명의 심층적인 욕망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가운데 높이 쌓아진 탑은 인간의 자기과시적 욕망을 표현하며, 나아가 종국적으로는 일방적인 지배로서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인간의 문명이 지니는 심층적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하며,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현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서가 기록된 고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권력은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대의 모든 권력은 노골적으로 예외없이 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자처했습니다. 모든 왕들은 신의 대변자로, 또는 화신으로, 아니면 신 자체로 받들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받들어진 권력자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강요합니다. “짐의 말이 곧 법”입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성서의 신앙 세계를 형성한 주인공들이 신물 나게 경험한 현실입니다. 이집트에서, 바빌론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겪은 일입니다.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분열과 갈등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가치관을, 자신의 언어를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하에 모두가 통합되기를 바라지만, 그 결과는 거꾸로 분열이요 흩어짐입니다.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통합은 획일화를 의미할 뿐 진정한 통일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강제적 획일화는 필연적으로 분열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한 언어의 기원에 관한 오늘 본문말씀의 증언은, 단지 다양한 민족 언어들의 다양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통 부재의 단절된 언어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획일적인 하나의 언어가 지배할 때, 높은 자리에 있는 지배자의 언어가 보편화될 때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성이 훼손되고 소통이 불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표층적 의미와는 다른 심층적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성서의 구원의 파노라마는 바로 그 일방적 지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사건은 마침내 성령의 임재로 사람들 가운데 그 해방의 사건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막힌 담을 헐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되게 한 사건, 그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는 정반대로 낮은 자들의 언어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가장 낮은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과 공감할 때 인간사회에 가로놓인 장벽이 무너지고, 나아가 사람과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에 놓인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인간문명이 지니는 심층적 욕망을 깊이 통찰하고 있는 본문말씀의 뜻은 오늘의 인간문명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문명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거부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문명이 지니는 위험한 요소에 대해서는 깊은 통찰을 필요로 합니다. 본문말씀은 그 위험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고, 여전히 오늘의 문명에도 타당하다는 것을 환기해주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위험사회(울리히 벡)라 하지만, 성서 기자는 이미 수 천 년 전에 인간문명의 위험성을 통찰한 셈입니다.
오늘의 인간문명은 여전히 자기중심적 지배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인간중심의 질서를 만들었고, 다시 인간들 사이에서 우월한 지배적 가치를 따라 인간사회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문명이 야기한 파국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기후위기가 발생하고,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위기 가운데 있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하나의 우월한 지배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사회의 질서는 극심한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갈망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 인간과 자연이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데 있습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을 뜻합니다. 단지 어떤 감정적 흥분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그 깨달음에 이르고, 오늘 우리의 교회가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모든 피조물의 탄식이 그치고, 사람들의 고통의 호소가 그치도록 하는 데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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