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영으로 거듭난 삶 - 요한복음 3:1~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5-30 20:24
조회
13072
2021년 5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영으로 거듭난 삶
본문: 요한복음 3:1~15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과 유대 서기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전해 주고 있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적으로 거듭난 삶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영성적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이 이야기는 상황 설정 자체부터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갈릴리 변방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이와 유대의 지체 높은 한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특이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잔치 집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킨 나사렛 사람 예수의 명성을, 니고데모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예수는 아직 이름 없는 젊은이에 불과했고 니고데모는 그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체 높은 예루살렘의 양반이 이름 없는 촌사람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가 특이합니다. 당시 한편의 사람들이 예수를 무식한 사람으로 배척했던 것(요한 7:15)과는 달리 자신이 대접받는 것과 같은 칭호(선생/랍비)로 부르며 마주하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이름과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첫째로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그것은 그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서기관입니다. 율법학자이며 선생입니다. 그는 율법을 실천한 도덕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학자이고 그에 걸맞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대 의회원입니다. 유대 의회는 최고의 종교기관이자 동시에 사실상 통치기구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의회의 의원으로서 그는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높은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있고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통 이쯤 되면 지금까지 쌓아 온 기반을 적절히 활용해 편안한 삶을 누리면 됩니다. 노후도 보장되어 생활상의 큰 어려움도 없는 축에 든다고 할 것입니다. 심각하게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할 필요를 느낄 처지도 아닙니다. 훈계하고 설득해야 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뭔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름 없는 한 시골 예언자의 소문을 예사스럽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누렸지만 여전히 진리에 대한 갈증, 일상의 삶으로 충족되지 않은 영의 갈증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과 자기가 믿고 있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쯤 되면 진리를 소유하고 하나님마저도 소유한 듯한 착각을 갖기 십상이지만, 니고데모는 진리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개방성, 하나님에 대한 열린 마음이 그를 움직입니다. 그는 이름 없는 시골 예언자 예수에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예수를 찾습니다. 왜 하필 밤중이었을까요? 아마도 지체 높으신 분이 이름 없는 시골 예언자를 찾아 나서는 행동이 눈에 띌까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세상의 어둠과 예수님의 밝은 빛을 대조하려는 성서 기자의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길을 나섰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의 니고데모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시편은 이렇게 전합니다. “낮에는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으로 나를 채우시니 나는 다만 살아 계시는 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시편 42:8). 유대 랍비들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밤중에 토라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끈을 낮에도 드리워주신다.” 남들이 자는 그 밤중에도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진리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는 뜬소문으로 들은 예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밤을 새워서라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리라’ 하는 마음으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를 찾은 니고데모는 정중하게 예를 차립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의례적인 차원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학식이 깊은 학자답고 사려깊은 발언입니다. 예수의 행적의 의미를 충분히 알겠다는 신학적 이해의 발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부적절한 성서번역문을 고쳐 읽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선생께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난다’는 말은 직역하자면 ‘하늘(위)로부터 난다’는 것으로, ‘거듭 난다’는 말로 정착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대목(3절, 5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삶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첫 발언은 신학적 이해, 합리적 이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생께서 하고 다니는 일을 보면 그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데...’ 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는 하되, 아직 자기와는 무관한 상태에서의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니고데모의 객관적 관심을 실존적 관심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객관적 지식, 지적인 승인의 차원에서 실존적인 체험의 차원으로 돌리는 예수님의 어법입니다. ‘남의 이야기하듯 하지 마시오. 바로 당신의 문제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 차원을 말하며,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진지한 니고데모는 엉뚱한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아마도 대화의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성서 기자가 사용한 수사적 기교일 것입니다. 육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대비하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염두에 두고 그 대비를 강조하는 어법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사실 니고데모의 엉뚱한 반응은 우리 모든 사람의 상식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학식이 깊은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반응을 보였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 반응은 사실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상식적인 생각을 드러냅니다. 바로 ‘육으로 난 것’은 그 세계를 대변합니다. 니고데모가 누리고 있었던 모든 명예와 지위를 함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육으로 난 것’은 꼭 악마적이거나 사악한 어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누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꼭 종교적인 신앙을,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선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대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혁명과 개혁을 추구하고 교육을 하고 자아개발 훈련을 합니다. 또한 요새 유행하듯 프로그램화된 ‘영성개발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는 버리고 싶은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정권을 교체했는데도 또다시 이전과 다르지 않은 현상이 반복됩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는데도 보고 싶지 않은 인간들을 또 만납니다. 직장을 바꿔봤는데도 고단하고 짜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영성훈련을 했다고 하는데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심드렁해집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하는 것은 바로 그 한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영으로’ 거듭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성을 초월한 종교적 차원을 말합니다. 맹목적으로 이성을 불신하는 비이성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알고 있고 해명 가능한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을 말합니다. 그게 뭘까,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 우리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의문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현명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윤리적 생활로, 해박한 신학적 지식으로,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결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범적이고 고상한 삶 자체로 그 답을 찾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으로 난 것’은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하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던집니다. 바람의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여러분은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당신은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습니다.”
‘바람’과 ‘영’은 다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어 ‘프뉴마’, 히브리어 ‘루아하’는 ‘바람’이나 ‘영’ 어떤 것으로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숨’과 ‘기(氣)’로도 번역됩니다. 여러분, 바람과 숨에 잡히는 실체가 있습니까?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살갗을 살짝 스치는 기운으로 느낄 수도 있으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 시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꽃잎을 살랑살랑 떨게 만드는 미풍으로도, 뿌리깊은 나무와 건물마저도 송두리째 뽑아 흔드는 폭풍으로도 다가옵니다.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고 보려 하면 보이지 않지만, 천지를 뒤흔드는 힘으로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바람을 해명하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그 현상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에게 성령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기가 막힌 비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으로 난다’는 차원은 바로 그렇게 바람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생의 도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의 세계가 그렇게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바람을 바구니에 담는다고, 상자에 담는다고 담아집니까?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영적 세계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며 이미 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고 영적인 거듭남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슨 허깨비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그 어떤 힘을 바라고, 우리의 삶을 거기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열어놓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의 진실한 삶의 태도입니다. 바람처럼 거침없이 사는 삶, 그것이 영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긴장감 더해지는 대화는 계속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합니다. “당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합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는 뜻의 말씀을 장황하게 펼칩니다. ‘나를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의 이 삶이 당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작정입니까?’ 하는 말씀인 셈입니다.
그 대화의 장면 이후 니고데모의 존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어느 순간에 ‘너’를 향한 말씀에서 ‘너희’를 향한 말씀으로 전환됩니다(3:11). 이 사실은, 니고데모 한 사람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상식적 세계에 안주해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씀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지내지는 그 순간에 니고데모를 등장시킴으로써(19:39)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밀도 높은 대화 장면이 압축적으로 재현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거듭난 삶과 영원한 삶이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본문의 맥락을 따라 웬만큼 그 의미를 헤아렸기에 더 긴 이야기는 줄일 수밖에 없지만, 거듭난 삶이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듯 영원한 삶, 곧 영생 또한 육체의 무한성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육체적 삶 자체를 떠나 영의 세계 또는 저세상으로 비약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 자체가 거듭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 삶이 영원한 진실을 구현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위력을 실감하듯, 우리가 그 삶을 맛보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 ‘영’이나 ‘영성’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 차원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흔히 통용되는 그 의미가 지극히 오용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사회적 영성>이라는 책을 함께 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말로써보다는 삶으로써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영적으로 거듭나고, 영적으로 소통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그 참뜻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한 동기를 키우고 펼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더하여, 아니 그 모든 것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으로 영으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하늘의 뜻과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아까운 시간과 정성을 바쳐 구별된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를 드리는 수고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적인 방법, 육적인 차원에서 어떤 일을 계획할 것 같으면 우리는 굳이 번거로운 이 길을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엶으로써, 바람과 같이 거침없는 삶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영으로 거듭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그 삶의 소망을 간직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