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소통하는 성령의 은사 - 고린도전서 14:1~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6-13 16:21
조회
12073
2021년 6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소통하는 성령의 은사
본문: 고린도전서 14:1~12



본문말씀은,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에 관한 사도 바울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사실 12~14장에 걸친 긴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으로서,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심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은사의 남용 또는 오용으로 저마다 잘났다고 하는 고린도교회 상황 가운데서, 여러 지체들로 이뤄진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오직 사랑으로(13장) 온전하게 되는 관계를 일깨워주는 말씀의 맥락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간결하게 말하면 이렇게 집약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되, 그 받은 은사가 방언도 좋고 예언도 좋다. 그러나 가능한 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예언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은사는 놀라운 언어사건, 소통의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후 교회에서 그 은사로서 방언은 특정한 종교적 체험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서로 받은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언현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열광적인 몰입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는 말로 기도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방언현상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방언이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은사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오늘날 방언을 하는 신앙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습니다. 다른 어떤 은사보다도 방언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은사체험으로 여겨지고 있고, 따라서 그 체험은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평하고 다양한 은사는 무시되고 오로지 방언만이 특권을 지니고, 따라서 그 은사를 받는 사람이 특권을 지니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 유명한 사랑의 송가로 충고를 합니다(고전 13장). 그 어떤 은사도 특권화할 수 없으며, 우리들 모두에게 오직 필요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과 무관하게 특정한 은사가 배타적으로 강조되는 현상을 두고, 아무렇게나 연주하여 시끄럽기만 한 소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1:7~8).

다음으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요체입니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1:1~4)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깨친 마음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갓 믿기 시작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어떻게 그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14~16)
덧붙여 말하기를,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깨친 마음(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1:19). 그래야만 서로 소통할 수 있고 서로에게 유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설령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될 수 없는 것이라면 깨친 마음, 곧 이성으로 짧은 몇 마디를 하는 것보다 결코 유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어떤 은사보다 서로 사랑하기를 최고의 은사요 덕목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 열광적 몰입상태에 빠지기보다는 깨친 마음, 곧 이성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소통할 수 없는 열광이라면 평범한 이성보다 못하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에서의 소통과 이루어야 할 삶의 진실, 바로 그 현실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신앙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서로 소통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빼버린 종교적 열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그렇게 남들이 공감할 수 없는 은사를 구하기보다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은사를 구하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역설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더 훌륭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뭘까요? 점쟁이가 앞날을 예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의 본래 의미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는 것, 그리스도교의 진실을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함축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가능한 내적 체험의 의미를 결코 깎아내릴 수 없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사를 구하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하는 의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오늘 본문말씀은 너무나 평범한 진실에 속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많은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중한 진실을 망각해버리는 것일까요? 어째서 사도 바울은 그 평범한 진실을 이토록 힘주어 강조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과도한 환상에 기대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환상과 현실을 착각하는 혼동에서 비롯됩니다. 한 순간에 영적으로 고양되고 싶은 욕망, 한 순간에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은 욕망에서 그 도착이 발생합니다. 종교적 신앙은 항상 그 유혹을 부추길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종교가 이른바 ‘인민의 아편’이 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환상에 의존하고 싶은 것은 현실에서의 불만과 고통 때문입니다. 돌풍을 일으킨 야당대표의 등장은 세대교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어떤 위험한 징후일 수도 있습니다. 기존질서에 대한 불만이 굴절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공정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가 내세우는 능력주의 원칙이 과연 결과에서 공평으로 귀결되는 공정을 보장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트럼프가 한국에 등장한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 또는 사회 일부 세력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어떤 환상에 몰입하는 현상에서, 우리들의 삶에 서로 소통하며 교류하는 신뢰가 무너지고 진정한 사랑이 부재한 현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서의 신뢰의 상실과 사랑의 부재는 환상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혼동과 환멸을 가속화시킬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린 심층적 요인입니다. 그저 몇몇 스캔들 탓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신앙 자체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환상에 몰입하여 있는 탓입니다.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악마화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상식이 되어 공감되고 있는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태도가 다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가 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선교과제를 새삼 확인하고 뜻을 모으자는 취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파의식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엄연히 한국교회 한 구성원으로서 특별히 맡아온 긍정적인 역할을 환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할 겨를은 없고, 이 시간에는 1970-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역사, 민중선교의 일선에 나선 역사를 환기하는 것에 그치겠습니다. 그 길에서 지체된 교회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오늘 본문말씀과 관련하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오늘 세계교회는 교회가 이 세계에서 구현해야 할 과제를 정의ㆍ평화ㆍ창조세계의 보전(JPIC: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오늘의 보편적 가치로 재현한 것으로서, 우리 교단이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그것은, 세계교회가 선교과제로 설정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 기장교회의 선구인 장공 김재준 목사께서 사용한 표현으로 하자면, 역순으로 생명ㆍ평화ㆍ정의와 일치합니다.
‘생명’은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장공은 일찍부터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역설했습니다. 생명은 그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장공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통찰에 힘입어 범우주적 생명 진화의 원동력을 ‘사랑’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온 생명의 본성을 사랑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평화’는 온전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를 한층 구체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밀쳐냄으로써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당기고 싸안음으로써 생명이 온전히 존속하도록 하는 조건, 그것이 평화입니다. 특별히 그 평화는 다양한 연결망 가운데 있는 집단과 집단의 관계의 온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장공은, 사람은 그 사람의 사랑하는 범위 만큼밖에 위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사랑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확대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랑의 범위를 한정된 집단의 범위로 제한함으로써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삶의 현실을 넘어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의’는 평화로운 생명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말합니다. 정의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집단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개별적 관계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의 몫에 대한 정당한 인정이 정의의 요체입니다. 배타적 권력의 독점과 배타적 물질의 독점은 그 기본을 무시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생명ㆍ평화ㆍ정의는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의도된 배열로서, 최고의 보편적 가치에서부터 보다 구체화된 가치의 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몫을 그 역순으로 일깨워줍니다. 지상의 평화, 궁극적으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이르는 출발점은 곧 이 땅에서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령한 은사, 더 좋은 은사를 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종교적 열광 상태에 몰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하고, 그것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의의입니다. 이를 위해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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