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이웃을 사랑하라 - 레위기 19:1~3, 13~18, 33~3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8-29 17:46
조회
403
2021년 8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네 이웃을 사랑하라
본문: 레위기 19:1~3, 13~18, 33~34



성서 가운데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책 가운데 하나가 레위기일 것입니다. 레위인 곧 제사장의 직무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 <레위기>로 이름 붙여진 이 책은 각종 제의규정과 금기사항들을 담고 있습니다. 암만 헤아려 보려 해도 그 합리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제의규정과 금기사항들만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결법전으로 분류되는 후반부의 내용은(17~26장)은 아주 상세한 윤리적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많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크게 봐서 레위기는 전반부의 제의적 규정과 후반부의 윤리적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제사장과 같이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의 기본 취지입니다.

계약법전(출애 20:22~23:19),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법전으로서 성결법전(레위 17~26장)을 포함하고 있는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 통찰은 이후 신앙의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본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영향은 양 측면에서 모두 결정적입니다.
레위기는 현재 성서의 구성상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착 사이의 여정에서, 계약법전에 이어 전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사실은 세 법전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계약법전이 정착시대 초기 상황을 반영하고, 신명기법전이 왕국의 번영기를 반영한다면, 성결법전은 포로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반적 내용이 출애굽이라는 극적인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레위기는 또 한 차례의 극적인 역사적 경험, 곧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해체되고 부정당한 역사적 경험을 반영합니다.
나라가 멸망에 이르고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시적인 제의마저 온전히 준수될 수 없었던 조건 가운데서 레위기는 그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문제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관심이 일차적으로 드러난 것이 제의 규정과 각종 금기사항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규정이 아니었습니다. 생명과 우주에 관한 세계관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으며 그것을 제의적으로 반영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오늘의 과학적 진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당대의 관념을 반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 정ㆍ부정의 법칙입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배제하고 정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정결법의 근거가 되어 사람들을 옭아매는 족쇄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것의 본래 뜻은 생명에 대한 경외에 있었습니다. 온전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한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동반한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삶을 위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우는 취지를 지닌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결법전, 곧 윤리적 규정은 그 정신을 일상의 삶 가운데서 구체화하는 방도에 관한 것입니다.

레위기가 담고 있는 제의적 규정과 윤리적 규정은 사실 하나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과 납득할 만한 내용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후대의 역사에서 그 영향 또한 두 갈래로 각기 다르게 나뉘어졌습니다.
하나의 방향은 제의 종교를 절대화하고, 또한 더불어 율법주의를 강화한 영향입니다. 제의 규정을 절대시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전통,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제의 규정을 절대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율법주의를 형성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전통에 대한 영향입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이웃 사랑의 보편성을 일깨운 가장 핵심적인 근거로서 역할입니다. 예컨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누가 10:25~34)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합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반문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 율법학자의 그 명답에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하라고 이릅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 그리고 그를 돌본 사마리아 사람을 대비합니다. 이 이야기는 당대 유대인들의 이웃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 사랑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핵심적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나아가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이 근거는 사도행전과 이후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계속 되풀이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희년의 정신 또한 레위기에 근거합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를 밑바탕으로 하는 레위기의 정신은 바로 오늘 보편적 사랑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정신을 일상의 삶 가운데서 구체화한 생활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의상 끊어 읽었지만 17장~22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장 첫머리는 거룩한 백성의 길을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대전제입니다. 19장은 전반적으로 십계명의 정신을 함축하면서 보다 구체화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직접 읽은 본문에 한정해 그 내용을 확인합니다.
13절은 이웃을 억누르거나 착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14절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15절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합니다. 16절은 남을 헐뜯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가면서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17절은 동족을 미워해서는 안 되고 이웃의 잘못을 일깨워 바로 잡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고 원수 갚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덧붙입니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33~34절은 외국인 나그네를 역시 “너희 몸 같이 사랑하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규정의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하고 싶지만, 맨 마지막 말씀에 주목합니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곧바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 율법학자가 던졌던 물음을 환기해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이 물음은 중요했습니다. 그 이웃이 동족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인지 하는 물음입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에게 그 범위가 선민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생각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사실 ‘이웃’이라는 말 자체가 그 미묘한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을 뜻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본문에도 그 긴장이 서려 있습니다. 똑 같이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이 18절의 말씀에서는 동족의 범위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인 반면 34절의 말씀에서는 명시적으로 외국인이라고 되어 있어 그 범위를 벗어납니다. 착한 사라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긴장을 해소해버립니다. 그야말로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따라서 이웃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주인공을 진정한 이웃으로 선포합니다. 이로써 보편적인 사랑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너무 익숙하기에 그 말씀이 갖는 충격을 쉽사리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웃은 그저 나와 가까운 어떤 사람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직감할 경우 그것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그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치 이러한 요구를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태도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놀랍거나 당황스러운 느낌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도 “네 몸과 같이!” 그것이 전적으로 낯선 타인에게 해당한다고 하면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탈레반의 위협을 느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390명이 한국에 안전하게 들어 왔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 “너희도 이집트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하는 말의 의미처럼, 전쟁을 겪고 어려움을 겪은 입장에서 그와 다르지 않은 어려움을 겪은 이들을 구출해낸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법무부는 애써서 ‘특별공로자’이기에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난민’이라고 하는 것보다 품격도 있고 위화감도 없어 그 말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여야만 하는 속사정이 있습니다. 받아들일 만한 사람을 받아들이니 염려 말라는 뜻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에 아무런 기여한 바가 없는 사람은 그저 곤경에 처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멘 난민이 500명 가량 입국했을 때 어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사실 그 당혹스러운 사태를 이야기합니다.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 자체 안에 이미 사람들이 저마다 한정하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이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정ㆍ부정의 원칙에 입각해 제의 규정을 말하고 있는 전반부의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정한 것, 잡스러운 것과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정결법과 이방인이라도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충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서의 기록자가 그 모순을 인지하지 못한 탓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전적으로 낯선 타인마저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대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생명 질서가 구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 가운데 현존하는 징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레위기의 한 가운데 박힌 가장 값진 보석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 핵심을 비켜가며 성서구절의 자구에 매여 불변의 규율로 삼고자 한다면 성서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예컨대 레위기 17~20장에 이르기까지 내용은 매우 다양한 구체적 생활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내용은 주목하지 않고 특정한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딱 두 구절(18:22; 20:13)만을 꼬집어 그것을 근거로 특정한 성적 지향을 금기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것일 뿐 특정한 성적 지향과는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 성서에 3,000번 이상 가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외면한 채 딱 네 군데(앞의 두 본문, 로마 1:26~27; 고전 6:9) 명시적으로 특정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구절을 두고 성적 소수자를 정죄하는 근거로 삼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를 타인 앞에 내세우며, 그것은 동시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우리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합니다. 그 요청은 우리의 통념을 넘어 진정한 생명의 길을 찾으라고 촉구합니다.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느냐, 바로 거기에서 생명의 길이 판가름된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낯선 타인이라도 정말로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가 온전히 구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숱한 난관이 있는 현실을 피할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요청이 던지는 과제 또한 피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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