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과 포용의 힘 - 데살로니가전서 5:12~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9-05 16:51
조회
6502
2021년 9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과 포용의 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2~24



데살로니가전서는 최초의 바울 서신, 따라서 최초의 신약성서 문서로서, 그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의 생애가 끊임없는 논쟁과 분투의 과정이었고 그런 만큼 모든 서신들이 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데 반해 최초의 서신으로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따뜻한 사랑과 평화의 인사를 전하는 마음을 그 기조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사도가 생각했던 이상적 교회상을 보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초기 교회의 실상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로마제국 시대에 매우 번성한 국제적인 무역항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래 빌립보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소요사태로 고발당해 빌립보를 떠나(사도 16장), 데살로니가에 이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도 역시 소요사태로 고발당해 떠나게 되었고(사도 17장), 아가야 지역의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이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아테네에서 디모데를 보내 공동체의 정황을 확인한 후 고린도에 머무르는 동안 기록되어(50~52년 어간) 전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어려움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온전히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논쟁적인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사도의 분노와 격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 왔으니 앞으로 더욱 잘 하라는 따뜻한 사랑의 격려와 평화의 기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굳이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어떤 교리를 설파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초기 교회의 상황 그리고 초기 서신의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인사말을 제외하고 사실상 결론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저 좋은 이야기요, 따라서 어떠한 상황, 어떠한 공동체에나 적용될 수 있는 권면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서신은 전체로서 하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까닭에 이 마지막 부분 역시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꾸준히 계속하라는 일관된 권면은 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첫 대목(12~18절)에서는 공동체의 덕과 각자의 몫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12절은 공동체내에 모종의 지도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 내의 지도력은 훗날 제도화된 교회의 직분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 열성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사도가 공동체와 함께 했더라면 사도가 맡았어야 할 몫을 담당하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존경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권면은, 공동체 내에 그들의 역할을 다소 귀찮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역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역할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화목과 온전함입니다. 공동체의 유대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감당하여야 할 몫을 강조합니다. 이는 훗날 ‘만인사제직’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 권면의 내용은,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게으른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소심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은 열광주의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을 말하며, 마음이 약한 사람은 박해로 말미암아(2:14) 믿음이 불안정해졌거나 죽은 이들에 대한 걱정(4:13)으로 동요하는 이들을 말하며, 힘이 없는 사람들(약한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에 매여 새로운 믿음의 확신이 결여된 이들(로마 14:1 참조)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에 다양한 편차가 있고 각기 다른 형편에 처해 있는 여러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알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할 것을, 이 대목은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되고 결여된 것을 질책이나 훈계로서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로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서로 돌보라는 권면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라는 권면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그 권면은 매우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함축하지만, 앞의 구체적인 권면과 관련해서 이해하자면 공동체 내에 이야기된 불편한 상황을 또다시 불편한 상황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지 말고 그 불편함을 넘어 서로를 세울 수 있는 방식으로 대처하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긍정의 힘이라고 할까요? 분노와 혐오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의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밑바탕이 될 때 공동체는 기쁨, 기도, 감사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기쁨, 기도, 감사의 생활을 할 때 공동체의 온전성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의 결론은, 일상적 삶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서 교회의 온전함과 그 안에서의 조화로운 관계에 한정된 권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결론은 일상의 삶을 넘어서는 삶의 차원을 강조합니다(19~24).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데살로니가서의 미묘한 자장이 이 대목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는 셈입니다. 극단적인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상생활에서의 책임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예언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낯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대목에서도 매우 균형잡힌 신중한 태도를 취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중요한 은사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고전 12:10).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차원을 인정하는 것이 맹목적 열광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재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차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통상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인간을 ‘영ㆍ혼ㆍ몸’으로 삼등분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하여 인간학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기보다는, 인간 삶의 그 어떤 차원도 배제하지 않고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역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인적 차원, 전인격적 차원에서 예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예비될 때 도둑같이 임할 수도 있는 그 사건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곧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그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마다의 삶 가운데 임재하는 놀라운 사건을 예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몇 날 몇 시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여정을 통하여 그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는 진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다지 놀랄 것 없지만, 오히려 가장 진솔한 진실을 전하는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로 그 점에서 초기 교회 신앙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 탓일까요? 오랫동안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습니다. 더 분명한 그 이유를 꼽자면, 다른 서신들이 신학적 논제를 뚜렷이 하고 있는 반면 최초의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러한 성격이 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또 한편으로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합니다. 다른 서신들은 가르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보다는 상호 교감하는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교회의 선포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야말로 교회의 선포의 범례로 새삼 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심각한 갈등과 불화의 상황에서 강권하는 훈계조와는 달리 전폭적인 신뢰 가운데서 서로의 약함을 돌보라는 따뜻한 공감의 언어로서, 최초의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의 진가를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철저하게 사랑과 공감의 언어여야 합니다. 우리가 불의에 맞서 분노하고 싸울 때조차도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 바탕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혐오와 차별의 논리가 횡행하고, 자기의로 가득 찬 독단이 횡행하는 사회와 교회의 현실에서 우리가 다시금 새겨야 하는 진실입니다. 그 진실을 따르는 믿음으로 정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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