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과 숨을 주시는 하나님 - 사도행전 17:24~2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0-09 16:41
조회
7166
2021년 10월 9일(토) 오전 11:00 가치교육연구소 ‘숨’ 개원예배
제목: 생명과 숨을 주시는 하나님
본문: 사도행전 17:24~28(17:22~34)

바울의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연설의 한 대목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가치교육연구소‘숨’ 계획서를 보면서, 그 개원예배에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고대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고라 광장과 신들의 성소인 아크로폴리스 언덕 사이 하얀 대리석 언덕 아레오바고에서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다른 문화권과 접촉할 때 그 전파와 수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접근방법을 함축하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구약성서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과 달리 전혀 다른 사고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고자 하였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배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서나 유대인들에게 공통되는 종교인식 내지는 신앙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동시에 빠지는 종교적 함정을 뛰어넘어 진정한 구도의 과정으로서 종교 내지는 신앙을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과연 무엇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지향했을까요? 바울은 처음 아테네에 이르러서 분노했다고 합니다.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17:16). 격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스스로를 절대화한 종교제도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노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풍부한 종교성이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풍부한 종교심을 존중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열어두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아는 데서는 진정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전부라고 착각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서 그 진정한 신앙의 가능성, 참 진리에 이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신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 신은 사람들이 지은 신전에 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굳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온 우주에 편만하신 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이 강조점은 성서의 지혜를 환기하는 것인 동시에 역시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성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일 뿐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신전에 집착하는 종교, 성전에 집착하는 종교, 제도의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전부로 아는 미숙한 종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그 안에 가둬둔다는 점에서 위험한 종교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야기하는 진실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이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당시 통속화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신관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합니다. 마치 절대 권력자처럼 인간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 존재로서 신에 대한 거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주셨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그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는 시대와 그 경계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성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주전 3세기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바울은 이처럼 낡은 시대의 종교, 곧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신을 믿는 종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도 충분히 공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인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에 공감하는 가운데 그렇게 설파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연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30절에 이르러 반전됩니다. 엄밀히 말해 반전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반전이라면, 이 대목에서부터 그리스인들이 말뜻을 잘 알아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 안에 그에 대해 더 생각할 겨를은 없기에 간략히 줄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되었다는 말에 아테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으나,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싶소.” 외치며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종종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분투하였지만, 사실은 그 시대정신에 투철하였고, 그 당대 세계인으로서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습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그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편화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가치교육연구소 ‘숨’, 그리고 내세우고 있는 가치로서 지덕체(智德體) 의미를, 나름대로 하나하나 새겨보고 싶지만, 자제하겠습니다. 다만, 그 지향하는 바를 보면서 오늘 본문말씀의 큰 뜻과 상통하는 것으로 느꼈다는 점만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는 오랜 복음을 전하지만, 늘 당대의 역사ㆍ문화적 환경 가운데서 그것을 새롭게 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현아 목사가 앞으로 활동해나가면서 그 활동의 정당성, 의의를 수없이 스스로 확인하고 또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말씀이 함축하는 뜻을 다시 환기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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