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맙고 아름다운 삶 - 전도서 12: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0-17 17:22
조회
466
2021년 10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고맙고 아름다운 삶
본문: 전도서 12:1~7



모처럼 흥미진진한 전도서의 말씀을 마주합니다.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하는 전도서는 언뜻 보기에 삶의 허무를 노래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삶 자체의 허무를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체가 허무하다기보다는 허무하게 사느라 발버둥치는 인생에 대한 탄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허무의 탄식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인생 찬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러저러한 삶을 다 겪은 현자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인생 교훈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앞장 11:7부터 이어지는 젊은이에게 주는 권고의 한 대목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에 대한 권고의 말씀만은 아닙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태도를 일깨우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젊은 날의 삶을 노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대비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는 노년의 모습은 노년의 삶을 폄하하려는 뜻을 지니기보다는, 인간 삶의 한계를 분명히 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한계(12:7)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삶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 오히려 스스로의 삶이 허락하는 한 그 삶을 맘껏 누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삶을 허락하신 뜻을 새기며 그 삶을 의미있게 채워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12:1~2)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12:7) 이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의 서론이요 결론입니다.
중간(3~6)의 말씀은 노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새번역>은 이 대목을 아주 매끄럽게 의역을 해서 오늘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해놨습니다. 이를 어찌 음미해봐야 할까요?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개역개정판>)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숴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새번역>)
히브리어 원문은 우화적(allegory) 표현으로 되어 있고, 그 수사적 표현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롭지만, 자제하겠습니다. 혹 다른 번역본을 대하면서 차이가 크게 난다고 느껴진다면 원문을 직역했느냐 의역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오늘 우리가 봤듯이 <새번역>이 새기고 있는 것처럼 그 뜻을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말씀의 뜻은 인간 삶의 한계를 분명히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직시할 때 인간은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그렇다면 의미 있게 삶을 누리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실은 본문말씀이 이어받고 있는 바로 앞의 11장에 그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환기해볼까요?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를 보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11:7)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지금 그것을 누리는 일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인지 환기합니다. 이 말씀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공기가 없어지거나 탁해질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압니다. 비극을 체험하고 절망의 상황에 처해야 인생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빛을 보고 해를 보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며 기쁜 일이라고 말합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면, 푸른 나무를 볼 수 있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심히 지나쳤지만 길가에 풀 한 포기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그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날을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두운 날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다가올 모든 것은 헛되다.”(11:8) 이 말씀은 빛을 보고 해를 보는 즐거움,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어두운 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비극적인 순간, 괴로운 순간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가올 모든 것은 다 헛되다.” 이 말씀은 미래가 없는 듯이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담보로 오늘의 삶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장차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장차 더 많은 것을 갖추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행복을 유보합니다.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쌓아두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헛됩니다. 정말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 줄 안다면,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또 이어 말합니다.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라. 다만,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11:9)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것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말씀의 반복입니다.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한 삶의 기쁨을 지금 이 순간 충분히 누리라고 덧붙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방종이나 순간적인 쾌락에의 탐닉과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기쁨이 남에게는 불쾌함이요 괴로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와 같은 기쁨 아닌 나만의 기쁨이 횡행한다면 인생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는 것은 남의 기쁨을 빼앗지 않는 나의 기쁨, 나아가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인생을 즐기는 것이 모두에게도 즐거운 일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적극적인 우정과 사랑으로, 나아가 공평한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삶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그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어두운 날’이 많을 수 있지만, 그렇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행복합니다. 본문말씀은, 결국 노쇠하여 죽음에 이르는 인간 삶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할 때 오히려 지금 주어진 삶의 고마움을 느끼고 의미로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거대한 전환』의 저자 칼 폴라니는 인간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주제는 오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폐해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경제체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른바 ‘사탄의 맷돌’로서 시장경제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시장이 인간사회 안에 스며들어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장이 인간사회를 집어삼켜 마치 맷돌이 곡물을 갈아버리듯이 인간 삶 자체를 갈아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징어게임>이 그리고 있는 참혹한 현실 아닐까요? 중요한 통찰은 그 인간 삶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대목인데, 여기서 성서의 위대한 유산을 확인합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었는데, 그 정신적 기원을 성서에서 찾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한 사람의 영혼 하나 곧 그 인격을 온 우주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근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지만 사실은 성서가 강조하는 공동체적 유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 인간 삶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 갖는 의미를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한계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을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한 삶을 의미있게 하는 길을 모색하게 만들며 그것이 자유를 향한 열정을 강화시켜줍니다. 그 깨달음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것’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분별하도록 이끕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삶, 그 삶이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삶 자체를 더욱 의미있게 만듭니다.
인간의 실존에 관해 깊이 있게 복합적인 통찰을 시도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 기도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고요함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바꾸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한계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숙명론이나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에게 허락된 가능성의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해줍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두 가지 차원을 분별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조화롭게 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대개 미국 교회의 관례를 따라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지만 우리의 절기에 맞춰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창조질서 안에서 각기 땀 흘려 거둔 소출을 내놓고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새기는 동시에 그 은혜 가운데 저마다 해야 할 몫에 따른 결실의 의미를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저마다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누리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서는 비록 유한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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