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 공평과 정의 - 예레미야 23:5~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1-28 16:21
조회
7386
2021년 11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 공평과 정의
본문: 예레미야 23:5~8



성서의 말씀이 여전히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만한 까닭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지난주일 말씀을 나누면서 생각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갈망과 그 갈망을 이루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성서의 신앙세계를 형성한 데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예언서의 증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마주하며 다시 그 물음의 의미를 환기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 모두 비범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비범하고 독특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풍전등화의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그의 예언활동은 민족의 운명과 고난을 자신의 개인적 삶으로 그대로 체현한 것과도 같았습니다. 성군 요시야 왕의 개혁정치가 반짝였지만, 그 영광은 그야말로 잠깐 뿐 이후 유다 왕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제국 바빌론에 의해 멸망에 이릅니다. 그 지도자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폐허가 된 고국 땅에 남고자 하였으나 유다 왕국 내의 반 바빌론파에 의해 이집트로 동행 망명하여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격랑의 역사 현장에서 예언을 선포하였을 때 그의 예언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수용되기 어려웠습니다. 예컨대 바빌론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을 때, ‘바빌론에 저항하는 것은 소용없다, 바빌론의 심판을 받아들여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국가주의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 없고, 민족주의적 입장이나 애국주의의 입장에서도 수용되기 어려운 선포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국가나 민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민중입니다. 민중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의와 평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이나 국가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에서는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구호가 제창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전쟁에 민중들이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호를 외쳤던 사회주의 정당들마저 애국주의에 타협하고 참전정책에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세계는 제1차 대전의 파국을 피하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을 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정의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예언자 예레미야에게서 이 문제가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국가냐 백성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정의를 역설한 것입니다. 그 정의가 무너진 국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선포였습니다.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선포였다면 더 많은 공감을 얻었겠지만, 예레미야는 확고하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지는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온갖 박해와 오해를 다 겪어야만 했고, 그런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통을 몸과 마음으로 다 겪어야만 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에 충실한 예언자의 운명이었습니다.

본문말씀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불의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에 이어지는 정의로운 통치자, 곧 미래의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희망의 선언입니다.

불의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은, 아마도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절에 선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종교를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였던 요시야 왕에 이어 여호아하스, 여호아김, 여호야긴, 그리고 이어 등장한 왕이 시드기야였습니다. 민중들의 삶을 염려하는 가운데 나라를 지키려고 애썼던 요시야 왕과 달리 이후 왕들은 민중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보존할 수 있는 국가를 지키는 데 부심했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취한 정책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가운데 여호아김 왕은 자신의 궁전을 짓는 데 막대한 재원을 투여하고 민중들을 동원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것입니다. 사실상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시드기야는 군사적 동맹에 의해 나라를 지켜보려고 부심하였습니다. 바빌론의 위협에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대처해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파국이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상황을 두고 “내 목장의 양떼를 죽이고 흩어버리는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1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무력할 뿐 아니라 백성들을 흩어버리는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 심판의 선언은 다시 반복됩니다.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2절)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사분오열 갈라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심판에 이어 3절부터는 남은 양들을 모으고 흩어진 양들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예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참 목자를 세우겠다는 약속 또한 제시됩니다.
그런데 진정한 메시아의 약속을 선포하고 있는 이 말씀은 한편으로 지금 백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양떼들이 흩어졌다는 것은 그저 마음이 갈라지고 분파가 갈라졌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백성은 잘못된 통치자들을 만난 덕분에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고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항상 두렵고 무서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의 삶에 아랑곳하지 않은 통치자들을 만난 덕분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가운데 불안해했던 백성들의 상황입니다.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그런 일을 겪지 않는 나라가 될 것임을 예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참 목자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더욱 분명히 선포합니다.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지도자,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주님, 이 약속의 선포에 구구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장을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백성들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바, 그것은 자신만이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고 평등하게,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실현될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어지는 7절 이하의 말씀은 그 의미를 재삼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무슨 말일까요? 이 예언은 지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새로운 역사가 갖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 새로운 역사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사건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위대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그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역사는 그보다 더 위대한 역사적 전환이 될 것이며, 사람들은 이제 그 역사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땅에서 공평과 정의가 이뤄진 가운데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더욱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요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상황 한 가운데서, 예언자는 진정한 미래의 희망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지금 백성의 안위를 돌보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상실한 국가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파산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선포한 시기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등장할 바로 그 즈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즈음 사람들은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왕은 국가의 파국을 막기 위해 동맹을 시도하고 애를 썼으며 많은 애국주의자들이 그에 동조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는 단호했습니다. 새로운 왕이 등장해도 이미 무너진 국가 시스템 하에서는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백성들을 살리는 공평과 정의에 의존하지 않은 국가 체제는 더 이상 무용하다는 선언입니다. 예언자의 그 예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멸망했고, 왕과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발버둥치는 그 현실 가운데서, 그 발버둥치는 일이 부질없음을 선포하고 근본적인 혁명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공위의 시대(time of interregnum)’, 그러니까 기존의 권위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권위는 등장하지 않은 시대에 예레미야는 사실상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체제를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가 등장했다고 믿고 있지만, 예레미야는 그 역시 낡은 권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언자 예레미야 당대에 그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예언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그저 기림으로써 신앙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이 땅 위에 현존하시기를, 임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 공평과 정의가 지금 이 땅 위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문명의 전환시기라고 다들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사회를 놓고 본다면, 확실히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 이제는 추격국가에서 선도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과연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가치의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제성장을 최고로 알고 내달려온 삶과 사회제도, 그 안에서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가치관과 결별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라들 사이에서, 사람을 포함한 피조세계 안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세계를 향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누리는 보편적인 문명을 이뤄야 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회의 시스템 자체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확신하고 펼쳐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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