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 - 빌립보서 4:4~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2-19 17:27
조회
1394
2021년 12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
본문: 빌립보서 4:4~7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빌립보서는 진정으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바울이 세운 유럽 땅의 최초의 교회 빌립보교회 교우들은 늘 스승으로서 바울을 존경했고,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람을 보내는가 하면 여러 가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전적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각별한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그 교회가 자신에게 베푼 배려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신실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 순간부터 바울이 그곳을 떠나 감옥에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시점까지 일관되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지지와 지원은 그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본문말씀은 그렇게 신실한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그 순전한 마음을 온전히 지키기를 바라는 뜻에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단호하게 반복되고 있는 이 말씀은, 기쁨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3:1에서 기뻐하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이 대목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강조한 것은 일상적인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희로애락을 무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쁨을 강조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문익환 목사님은, 사랑은 생명의 충일함에 대한 기쁨으로 표현되지만, 그 기쁨의 심연은 슬픔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의 심연이 슬픔인 것은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앗아가는 현실 때문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기쁨이기에 불행한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그 기쁨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픈 눈으로 보고 슬픈 마음으로 깨친 인식은 곧 구원의 길”이 된다고 했습니다(최형묵, “꿈을 현실로 산 신앙의 선구 문익환 목사” 참고).
사도 바울이 기뻐하라고 한 것은, 단순히 일희일비하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그 근원적 기쁨의 차원을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가까이 계시다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은 여전히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온전한 사랑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뜻을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단순히 개인의 자기만족적인 어떤 심리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베푸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기쁨은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로써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형성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거꾸로 사람들이 늘 염려로 시달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말씀은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돌아보도록 요구합니다. 염려가 그냥 접는다고 접어집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할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과 정확하게 대구를 이루는 이 말씀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일 역시 저절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노력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6:25절의 예수님의 말씀과도 그대로 상응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이 더하여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말을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이치, 삶의 이치를 새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간구라고 권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깨닫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나타냅니다. 기쁨을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용으로 알리라고 한 것처럼,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리는 것은 자신을 염려에 휩싸이게 만드는 현실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 소통하는 그 마음이 답을 찾아줍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 뜻, 그 길을 적극적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뜻,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찾으면, 그 다음에 자잘한 염려는 사라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도와 간구를 하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응답이 주어질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베푸신 것을 환기하고 그것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진실을 기억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길이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결론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에게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나 개인의 이해타산으로는 미처 헤아릴 수 없었던 해결점, 나아가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인과법칙의 세계 안에서 찾지 못했던 답이 찾아진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가져오는 초월의 은사입니다. 진정한 은혜의 차원입니다. 스스로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응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답이 진정한 삶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이 자기의 아집을 강화시키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예기치 못했던 현실 앞에서 그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면으로 보나 소수자였습니다. 그 무리가 적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였을 뿐 아니라, 당시 주류 사회의 변방에 있었다는 점에서도 소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팎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난무했고, 따라서 신앙에 대한 회의도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유대교로부터의 공격이 있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상 대개가 물리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단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박해마저도 무력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게 된 사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에 좌우되지 않고 진정한 믿음을 구현한 삶 때문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고자 하는 진지한 삶, 곧 진정한 의미의 긍정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제국의 질서를 지탱하는 힘의 논리를 무력화시키고 진정으로 우월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항변은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동시에 우리의 행동을 촉발시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뜻,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찾아나서는 데서 나옵니다. 스스로에게 기쁠 뿐만 아니라 타인을 감화시키는 마음과 삶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유념해야 하는 진실입니다. 분노와 저주로 상대를 넘어뜨리면 된다는 편향만 난무하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더더욱 절감하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요즘 한류가 세계적 현상이 되면서 새삼 주목받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른바 ‘소프트파워’(soft power)라는 개념입니다. ‘하드파워’(hard power)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사람을 복종시키는 힘은 대개 강압과 보상을 통해 발휘됩니다. 채찍과 당근입니다. 하드파워입니다.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사람은 전적으로 그에 따라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강압과 보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매력에 이끌려 움직이기도 합니다. 자발적으로 따라 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힘입니다. 그걸 일러 소프트파워라 합니다. 과연 한류의 미래가 어찌될지는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상황에 비유하여 오늘 본문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요?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모든 것을 갖춰야 영향력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선한 영향력보다 오히려 악한 영향력을 더 강화시켰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상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영향력,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천적으로 이 세상에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믿음을 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주어지는 보상 여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추구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뜻을 지키고,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따르는 것 자체를 감사의 조건으로 알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 믿음, 그 삶의 태도를 우리는 추구합니다.
그 믿음과 그 삶의 태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를 바라며, 그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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