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 가운데 나타난 말씀의 진실 - 요한1서 1: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1-02 15:54
조회
1205
2022년 1월 2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우리 가운데 나타난 말씀의 진실
본문: 요한1서 1:1~4



천안살림교회 22년의 역사 가운데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6년을 지나 7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잡은 이래 주민들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로 평안을 기원하며 덕담을 나누는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향교와도 특별히 갈등을 겪어야 할 일도 없습니다.
처음 교회당을 짓기 시작했을 때 향교측에서 반대하고 나섰던 일을 우리는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예정의 변경 없이 여기에 교회당이 편안하게 자리 잡게 되었지만, 그때 겪었던 일들은 항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향교측에서 여러 반대 이유를 이야기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땅은 하정배들이 망배단을 쌓는 자리이지 당신들이 섬기는 존엄한 주님을 모시는 자리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곧바로 맞장구쳤습니다. ‘성경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 육신은 종의 몸을 뜻하니, 그렇다면 교회자리로는 딱 제격이다.’ 놀랍게도 복음의 진실을 확인해주고, 우리 교회의 몫을 일깨워주는 일화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다시 요한서신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의 첫머리입니다. 다시 확인하지만, 요한서신은 요한복음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비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인을 배척한 유대인을 겨냥하고 있다면, 요한서신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의 사상을 전제로 하여, 크게 두 가지 요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체입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1~2)
직접 목격하고 만져본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와 함께 삶을 사셨던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가 제자 요한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꼭 예수님과 삶을 직접 나눈 제자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적 존재로 이 땅에서 삶을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난 사건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삶, 육체적 삶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이른바 영지주의적 신앙에 따른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허깨비일 뿐이라고 믿고 진정한 진리는 영적인 데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서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우리와 똑 같은 삶의 자리에 내려오셨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곳, 바로 그 지점에 진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 가운데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떠나 영적 차원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편향에 대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 그 자체 안에 영적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은 두 번째 요체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1:3)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소통과 교제를 말하며, 나아가 그 소통과 교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과 교제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코이노니아)은, 요한 문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곧 하나님과의 교통을 바탕으로 하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통은 성도의 교제로 표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거는 방식, 곧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여주며, 두 번째로는 그 관계 안에서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쉐마’가 함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명 6:4~5) 이 선포는 자기 자신을 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 계명이 잘 지켜졌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마저도 사람들 저마다 자신의 주관적 욕망에 의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말 자기만의 세계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회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서는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여기서 육신은 그저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몸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종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그렇게 선포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나님께서 입장을 바꿔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났다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또한 그와 같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를 일깨워줍니다.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아예 상대의 입장에 설 수 있을 때 진정한 교제가 이뤄지고,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구체화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진실입니다. 말씀의 육화입니다.
오늘로서 22년을 채우고 이제 23년을 맞이하는 우리 천안살림교회가 일관되게 지켜왔고, 앞으로 또한 일관되게 이어가야 할 정신의 밑바탕을, 오늘 말씀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천안살림교회가 지향하는 정신은 우리의 지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적 공동체’, ‘선교하는 교회’,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연대하는 교회’, ‘민주적인 교회’, ‘공부하는 교회’, ‘친밀한 공동체’, ‘희망이 있는 교회’(홈페이지 참조), 이렇게 구체화된 지표를 관통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늘 본문말씀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말씀의 육화,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은 방식으로 우리 또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우리들끼리 그렇게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저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것으로 자족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육화하는 것, 곧 우리의 삶으로 실현하는 것을 우리 교회의 본분으로 여깁니다. 개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는 물론 사회 안에서 서로 그런 관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사회학자가 목사들을 두고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107~108 참조). 성경 말씀이 삶의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려는 실험이었습니다.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와 그 밖의 구절을 배정했습니다. 각각 다른 본문을 배정받은 목사들이 설교를 하러 가는 도중 도로변에 주저앉아 콜록거리는 사람을 배치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배정받은 사람은 행동양식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각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지은 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시간의 여유 여부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삶의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주고 있습니다. 삶의 구조와 환경이 그만큼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매여 이웃사랑을 외치는 사람마저도 실제 내 눈앞에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정말 심각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그 한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나서고 선행을 하는 이들이 또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는 교회, 말씀의 육화를 선취하는 교회이고자 합니다. 사회가 부조리하고, 다수의 교회마저 그 부조리한 현실에 편승해가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믿는 바를 스스로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정의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남을 존중하는 인권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상상력과 우리의 행동양식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 체험을 먼저 누리고 그것을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뜻을 지향합니다.
이제 말씀 후에 청년들이 준비한 영상을 함께 보며 잠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천안살림교회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저 자기만족에 도취한 교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말씀의 진실을 새기고, 그 뜻을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나아가 세상 가운데서 실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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