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 - 시편 73:1~2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7-17 15:53
조회
1263
2022년 7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
본문: 시편 73:1~28



구약의 다른 책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면, 시편은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이 드린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 그리고 탄식의 성격으로 나뉩니다.
우리말 ‘시편’(詩篇)은 문학적 유형에 따른 명칭에 해당하지만, 히브리어 ‘테히림’(Tehillim)은 ‘찬양’ 곧 노래를 뜻합니다. 영어 Psalm의 기원이 되는, 칠십인역 그리스어 Psalmoi는 ‘현악기에 붙여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봉독하기에는 길지만, 굳이 73편 전체를 본문으로 삼은 것은, 봉독하는 가운데 그 뜻을 새겨보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까?

시편 73편은 현실의 부조리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괴리 때문에 분투하는 사람의 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에 관한 가장 으뜸가는 성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신앙세계 안에서 심각하게 문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똑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욥기는 방대하고 웅장한 서사 구조 안에서 세세하게 그 문제의식을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시편 73편은 간결한 한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욥기에 비하면 단순소박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감은 결코 덜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오히려 훨씬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환기해볼까요? 첫 대목(1~2절)은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현실의 부조리를 보면서 무너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대목(3~12절)에서 그 부조리한 현실이 무엇인지 꼬집습니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복을 누리는 현실입니다. 세 번째 대목(13~16)은 신앙에 대한 회의와 탄식입니다. 그런 현실에서 도대체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대목(17~26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인하는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결론(27~28절)으로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현실의 부조리함 때문에 신앙에 회의를 갖는 것은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복을 누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묘사하는 대목을 보면 누구나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얼마나 적나라합니까? 몸에 윤기가 흐르고,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통도 재앙도 당하지 않고, 오만과 폭력을 일삼고, 남을 깔보며 악의에 찬 말들을 함부로 뱉으며, 하늘과 땅을 능멸하며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악인들이 늘 신세가 편하고 재산만 늘어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가 살아 있는지, 의로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번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반면 고난은 죄에 대한 벌로 여기는 상식이 통용되는 현실 가운데서, 거꾸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롭게 살아온 사람은 고통을 겪는 반면 오히려 악인이 더 잘 나가고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당연히 던질 수 있는 물음입니다.
성서시대 시인이 민감하게 느꼈던 그 문제의 상황은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상황을 공감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서 제기된 신앙의 회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7절 이하에서 그 회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확인하는 전환이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과연 어떻게 회의와 절망의 탄식이 확신과 희망의 탄성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이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회의에서 확신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7절) 악인의 말로는 파멸이며, 따라서 의롭게 산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 주목할 것 같으면 제의적 상황, 곧 예배드리는 상황을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어떤 계기, 가장 유력하게는 사제의 말씀을 통해 진실을 깨닫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소’를 꼭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기도자의 내면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황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환의 계기가 그것이었다 하더라도 절망과 회의의 탄식이 희망과 확신의 탄성으로 바뀐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습니다. 시인이 속한 공동체가 경험한 중요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가나안의 자유 생활로 이끈 해방의 사건, 해방자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서의 신앙은 이 사건을 기초로 합니다. 그 기억에 비추어 볼 때, 시인이 탄식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과거 히브리 민중이 겪었던 바로 그 억압체제가 눈앞에서 일상으로 재현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지금 그 옛 역사의 기억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은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15절) 이는 우선 악인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보려고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3절) 이는 타인의 시선에 매여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라고 끝내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시선을 떨쳐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빚었을 것이라는 고백은, ‘주님의 자녀들’로 표현되는 공동체 가운데 시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방의 경험을 공유하고, 비록 그것이 왜곡되는 현실이 빚어지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금 온전히 해방을 성취하실 것이라 믿는 백성입니다. 그렇게 공유된 공동체의 이상과 가치를 시인이 의식하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편의 탄식시는 모두 공통의 문학적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탄식에서 찬양과 감사로 급반전하는 양식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은 성격상 지혜시로 분류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탄식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모든 탄식시의 급전환 모티프는 야훼 하나님의 해방의 사건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기억이 끊임없이 현실의 부조리를 문제시하고, 끝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따르도록 합니다. 시인의 전환은 단지 제의적 맥락에서 이뤄진 것만도 아니요, 심리적 경험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그 밑바탕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특유의 역사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역사에 대한 기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24절) 그 전환은 보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의 방향 전환을 뜻하기도 합니다. 지식에서 신앙으로 전환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의 한계를 넘어 바람직한 세계를 지향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지식과 신앙은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제대로 보고 알기에 그것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지향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이요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존재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 상상이 가능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백성을 온전히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더불어 성서일과의 한 본문으로 제시된 아브라함 이야기(창세 12:1~4),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 11:1)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믿음은 이뤄지기를 바라는 바람직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확신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확신을 공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정을 이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는 유일한 성서본문(출애 3:14), 곧 “나는 나다” 또는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나일 것이다.”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그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부당한 권력이 지배하고, 부조리가 만연해 있어, 사람들이 종살이하고 고통을 겪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당위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 73편은 결론으로, 악인의 파멸을 사필귀정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마땅한 귀결입니다. 절망의 탄식과 회의로부터 희망의 탄성과 확신으로의 전환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공유하는 연대 가운데서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이 탄식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은 세계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이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는 그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실천하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부조리한 정책과 삶의 관습을 거부하고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믿음 가운데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나온 역사는 빈 공백이 아닙니다. 우리를 일깨워주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 현실 가운데서도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숱한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스펙을 쌓는 둥 난리를 치고, 그런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득세하지만 그와는 명백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시인 송경동은 최근 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난 곡류와 단백질만을 섭취하며 자라오지 않았다. 대다수 인류가 실현하는 끊임없는 사랑과 노동과 헌신, 그 선한 힘을 나눠 받으며 이만큼이나마 자라 왔다. 이 길이 맞는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함부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만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우리의 여정을 인도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진정한 희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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