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달란트 이야기, 그 불편한 진실 - 마태복음 25:14~3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8-14 13:18
조회
443
2022년 8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달란트 이야기, 그 불편한 진실
본문: 마태복음 25:14~30



달란트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말씀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만큼 이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가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저마다의 재능을 소중히 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전형적인 이해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이해가 유일한 답일까요? 본문말씀의 비유는 사실 상당히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으며, 그만큼 골치 아픕니다. 비유는 사람들이 가장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어째서 골치 아픈 본문이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비유의 본래 자리와 오늘의 역사문화적 맥락이 달라진 데 있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 본래 비유를 말씀하셨던 맥락과 이를 기록한 초기 교회의 맥락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록 당시에 이미 비유가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달라진 맥락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해석학적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지만, 전문가들만 그것을 분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성서 독자라도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성서의 다른 문헌에서는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비교하는 방법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누가복음(19:11~27)에 병행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같은 비유인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돈의 단위가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므나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달란트로 되어 있습니다. 한 므나는 일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일만 데나리온이니 그 금액의 차이가 100배에서 500배 이상 차이 납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똑같이 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차등을 두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누가복음에는 주인이 ‘왕위를 물려받을 귀족’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는 그저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비유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은 헤롯왕의 아들 아켈라우스와 상응하고 있고,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가 왕이 된 과정과 그대로 상응합니다. 헤롯왕이 죽고 난 다음 아켈라우스는 로마로부터 왕권을 승인받기 위해 로마행을 합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켈라우스는 로마로부터 왕권 계승을 승인받고 그 반대세력들을 처참하게 제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므나의 비유가 그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면, 본래 그 이야기는 권력자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문맥이 예루살렘 입성 직전이어서 권력자들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이야기로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반면 본문말씀인 마태복음의 비유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는 결부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역사적 배경 없이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 여행을 떠난 후 그 맡겨진 돈을 종들이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순전히 돈놀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돈놀이 이야기 자체에 메시지를 담고, 그것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태효과’라는 말까지 유래했습니다. 비유의 요체를 다시 환기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습니다. 각기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온 후 다섯 달란트를 벌고 두 달란트를 번 사람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맡기겠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놓은 종은 크게 질책을 받았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 질책으로 끝나지 않고, 한 달란트 가진 것 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넘기고 쫓아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것도 금융자본이 만개한 시대에 이 돈놀이 비유는 너무나 쉽게 이해됩니다. 비유의 마지막 결론인 부익부빈익빈 현실까지 너무 실감납니다. 그러니 가진 능력과 자원을 최선을 다해 선용하는 것이 곧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이라는 교훈을 곧바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께서 지금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비유를 이야기했을까요? 아무리 비유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난한 민중들이 가장 혐오하는 일을 갖고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의 소재로 삼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는 알기 쉽게 그 뜻을 전달하려는 이야기 방식인 만큼 그 청중들이 거북스러워하는 내용은 피하고 핵심을 찌르는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비유가 변용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마태복음의 비유 또한 그 나름의 맥락에서 변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산의 손실과 인신의 구속까지 초래하는 당시 돈놀이의 폐해로 고통을 겪는 민중들 앞에서 그것을 긍정적인 본보기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본보기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동일시한 예수님의 언행, 그리고 부의 불평등과 그로 인한 갈등과 고통의 상황을 신랄하게 드러내신 말씀들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금융이 애초 자선에서 기원하는지 약탈에서 기원하는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으며, 그 약탈적 성격을 억제하고 인간 삶을 위해 선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성서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교회의 가르침은 그 약탈적 성격을 주목하고 억제하는 데 압도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모든 문명이 그 점에서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이자를 금지하는 신명기(23:20)의 가르침을 따라 자본의 투자와 대부에 따른 이자를 금지해 왔습니다. 초기 교회는 물론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일관된 입장이었습니다. ‘일용한 양식’이면 되었지 무슨 부의 축적이냐, 노동 없이 어떻게 돈이 돈을 낳을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이 오랫동안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초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중세기 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 심지어 종교개혁가 루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가르침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교회가 그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윤리로 용인된 것은 종교개혁이 진전된 16세기 후반 칼빈주의의 등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것도 무제한적으로 용인된 것이 아니라 부의 선용이라는 전제하에서였습니다. 금욕과 절제를 통해 자신의 직업노동에 충실함으로써 부를 쌓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부의 축적이나 이자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서 위배된다고 보았던 데서, 생산적 활동을 위한 투자와 정당한 거래 조건 안에서 이자가 허용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은 16세기 후반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 부와 금융소득의 문제에 대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고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아무런 비판적 의식 없이 돈놀이가 긍정적 본보기의 소재가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더욱이 언제나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일차적 청중으로 마주하였던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로 이 비유를 말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틀림없이 다른 데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민중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그 현실을 드러내고 그 현실을 넘어서는 데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마지막 종이 그렇게 말했을 때 청중들은 어땠을까요? 오히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이렇게 맞장구쳤을 것입니다. 그것은 금융자본의 약탈적 성격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돈놀이를 긍정적 본보기로 삼고 있는 본문의 비유를 오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는 명백히 초기 교회의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 안에서 각기 맡아야 할 몫에 대한 교훈으로 삼은 것입니다. 마태는 이 대목에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교훈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고, 앞의 유사한 또 하나의 비유와 그 의미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에 관한 비유(마태 24:45~51)입니다. 그 비유는 그저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비유로서 오늘 본문을 덧붙인 것입니다. 부여받은 능력과 자원을 최대한 선용함으로써 하늘나라에 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마태가 이 기록을 남겼을 때는 금융의 선용을 유념하였을 것입니다. 그 폐해에 대해 그렇게 압도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전통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넣었을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후대에 그 이야기가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오용되는 사태입니다.

본문말씀은 철저히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던 본래의 자리에서 그 뜻을 되새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기록상 이미 매끄러운 해석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그 뜻을 다시 새기고자 하는 것은 그 까닭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본래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헤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복음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그 경이로움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금 그 태도를 가다듬기 위해서입니다.
본문말씀의 비유가 본래의 자리에서 갖는 의미는 결코 개인의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것일 수 없으며, 불로소득에 따른 부의 불공평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 현실을 넘어선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는 것으로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의 변화는, 별다른 충격 없이 개인적인 도덕적 교훈을 얻는 데서 부조리한 세상의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감당할 몫을 깨닫는 책임적 태도로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불편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의 놀라운 철저성을 되새길 수 있고, 그 뜻에 따라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 진실을 깨닫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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