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 나라의 시작 - 마가복음 2:1~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0-23 13:51
조회
2300
2022년 10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 나라의 시작
본문: 마가복음 2:1~12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 1:15). 그 선언 이후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곧바로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으로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일련의 치유 이야기 말미에 나오는 본문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을 집약이라도 하듯 여러 가지 심각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풍 환자를 치유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믿음, 사죄, 치유 등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중요 주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고, 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문 앞에 들어설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그 때 중풍에 든 사람을 네 사람이 들것에 실어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접근할 길이 없어 예수께서 계신 집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그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서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고대적 관념이 배어 있습니다. 질병은 그냥 단순한 육체적 증상이 아니라 모종의 악마에 사로잡힌 상태라는 관념입니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지붕을 뚫고 이동한 것은 악마를 속이는 행위로서 도망갈 출구를 차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하는데, 지붕을 뚫고 들어온 다음 지붕을 막아버리면 악마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혀 제압당하게 된다는 관념입니다. 마가는 그 관념에 동의할 수 없었던 탓에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택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사람들과 환자를 보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높이 사며, 환자에게 사죄(赦罪)를 선언합니다. 그 선언과 더불어 환자는 치유를 받습니다. 여기에 특이한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환자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를 돕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 산 점이요, 치유의 선언 대신에 사죄 선언을 한 점입니다.

치유의 기적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항상 예수께서는 그 사건 당사자들의 믿음을 주목합니다. 그 기적의 사건이 일방적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상호교감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이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때는 기적을 보이지 않지만,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 앞에서는 지체 없이 응하십니다. 믿고 내 맡기는 태도에는 지체 없이 응하십니다. 기적 사건의 바탕에 진실한 인격적 교감, 상호간의 소통과 교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환자 자신만이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그를 도우려는 이들 또한 그 믿음의 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꼭 예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로마의 백인대장 이야기(마태 8:1~13)나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마태 15:21~28)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부하와 딸의 질병을 두고 호소한 경우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와 함께 하는 이들의 믿음의 연대가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함께 우는 마음, 함께 비를 맞는 태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줍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사죄의 선언을 하고 그로써 환자가 치유를 받는 사건은 더욱 놀랍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 자리에 있던 율법학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당시 유대인의 통념으로 사죄의 특권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제에게 허용될 때에도 반드시 희생제물과 더불어 엄격한 제의를 동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통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가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대행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사죄 선언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죄의 권한은 놀라운 치유의 기적으로 곧바로 입증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죄의 선언과 치유의 기적이 동일한 사건을 나타내고 있는 점은, ‘죄’의 의미를 사람들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병자에게 덧씌워진 죄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덧씌워진 죄의 굴레를 부정하고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이 치유의 요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당대의 관념에서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중풍 환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그 질병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치유를 선포하는 것이 당장 절박한 요구이며, 그런 만큼 치유의 선포가 쉬운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죄의 선언을 먼저 하십니다. 사람들이 병자에게 덧씌운 죄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잘못된 통념에 대한 부정을 뜻하며, 질병의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모든 사회적 환경의 부당함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여기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 메시아적 존재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저 사람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라면 그 의미는 더더욱 놀랍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죄를 거부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거니와 그 말씀은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것을,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고대 세계에서 질병에 대한 통념과 그로 인한 병자의 고통을 헤아려야 합니다. 육체의 질병은 악마에게 붙들린 상태이거나 신의 징벌을 받은 상태라는 것이 당시의 통념입니다. 그러니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였을까요? 육체적 질병 그 자체도 괴롭거니와 더더욱 괴로운 것은 질병을 겪고 있는 자신을 향한 사회적 시선입니다. 뭔가 잘못한 죄인,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시선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질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회로부터 격리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그 질병이 하나님의 징벌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죄의 선언은 사회적 편견과 그 편견에 따른 차별의 시선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 그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사회적 질병,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사회적 질병 그 자체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선포합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이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진정한 치유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의 치유가 의술상의 치료에 한정될 수 없습니다. 전반적인 삶을 치유하는 과정, 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합니다. 양방 백방으로 치료해도 안 잡히던 증상이 한방으로 치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육체적 질병 그 자체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더라도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이 진정한 치유의 역할을 맡는 경우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질병의 고통을 더욱 강화시키는 근본 원인을 주목하고, 그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마가 2:13~17)에서 그 진실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탁을 함께 하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를 보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의 굴레에 매인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이 말씀의 진실은 변함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겪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떤 불편한 시선으로 가중되는 괴로움을 겪지 않고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사회와 주변의 인간관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삶의 의미는 오히려 더욱 빛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한계 상황과 고통의 상황을 겪을 수 있다고 자각하고 있는 사회는 훨씬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사회는 그 만큼 성숙하고 안전한 사회입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겪는 한계 상황과 고통의 상황은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은혜를 체감케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한계와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요한 9:1~3).
자기만의 편견에 따라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사회가 순결해지지 않습니다. 갈등과 고통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잘못된 편견과 그 편견을 정당화하는 삶의 조건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첫 걸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그 나라가 널리 퍼져나가도록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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