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절망을 이겨내는 삶의 분투 - 누가복음 18: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1-13 14:23
조회
3399
2022년 11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절망을 이겨내는 삶의 분투
본문: 누가복음 18:1~8



본문말씀은 지난주일 본문(누가 17장)에 이어지고 있으며 그 결론에 해당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한 깨우침이 본문말씀의 비유로 종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어떤 고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고을에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재판관을 찾아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달라고 거듭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은 재판관이었지만, 결국 여인의 간청을 못 이기고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본래 비유의 요체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부연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목할 것을 권하면서,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권리를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찾아주실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해설은 재판관에 초점을 맞추고 그 재판관의 반응을 사람들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대비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요구에 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권리와 요구를 모른 채 하시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오랫동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지 간절한 기도의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밑바탕이 되는 삶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라 할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소망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절망하지 말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요체를 말하자면, 본문의 비유는 그렇게 집약됩니다.

비유는 일상의 삶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소재 삼아 이해할 만한 핵심적 내용을 말하는 교훈방식입니다. 그 점을 유념하면서 이 비유를 다시 볼 때, 두 가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과 이 비유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첫 번째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한정해서 받아들이기 쉽지만, 이 말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곧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기도는 절망하지 않는 삶을 그 밑바탕으로 합니다.
두 번째 비유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그 뜻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해설은 재판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비유가 그리고 있는 상황은 과부의 처지와 태도에 초점이 있습니다. 권리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그 억울함을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는 재판관마저도 전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 상황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예수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홀로된 여인을 억울하게 한 사람으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수도 있는데 반해 이 여인은 그런 뇌물을 제공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재판관이 공적으로 역할을 위임받았기에 그 마땅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여인이 간청하는 상황입니다. 여인은 그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간청합니다. 재판관이 태도를 바꾼 것은 여인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간청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기도의 주술적 효과를 가르치는 데 핵심이 있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특별히 불의한 재판관의 태도와 대비되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절망하지 않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굳이 다시 “절망하지 말라”고 일깨우신 뜻이 어디 있을까요?
많은 경우 현실을 지배하는 언어는 희망보다는 절망입니다. 희망을 말하는 많은 언어들조차도 사실은 절망일 때가 많습니다. 절망은 비단 폭력적인 상황으로만 우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고 현실의 적응만을 강조할 때 설령 희망을 말한다 해도 그 속 내용은 절망일 뿐입니다. 복음서는 그러한 상황을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도 예수의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살았다기보다는 현실의 논리를 따라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대안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처한 것은, 비단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의 처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질서와 그 논리는 언제나 큰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속마음으로는 항상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그런 의미를 함축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 ‘꿈을 꾸어라.’ ‘소중한 것을 지키고 얻기 위해 분투해라.’ 이렇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절망스러운 상황, 그 자체를 탓하며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더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셈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접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52년 전 오늘 1970년 11월 13일 최악의 저임금에 시달리며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온 몸으로 저항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가 있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그 날 “일요일은 쉬게 하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스러져갔습니다.
52년이 지난 오늘 과연 우리사회는 얼마나 변화되었을까요? 세계인들도 놀라고,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변화되었습니다. 최빈국의 상황에서 선진국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독재정치를 벗어나 정치적 민주주의 또한 진전되었습니다. 최첨단의 기술을 향유하는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한류 열풍까지 더하면 문화적 자부심 또한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사회는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매여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조건 안에서 경쟁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1987년, 그리고 2016~17년 촛불 이후에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었지만, 그 기조에서 그다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더더욱 모든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52년 전 전태일이 외쳤던 노동권 보장은 아직도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는 노동조건을 갖추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어렵사리 제정되었지만, 국정 최고책임을 맡은 자는 “경영의지를 악화시키는 메시지를 주는 법”이라며 이를 개악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을 무력화하는 노동법이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등으로 노동자는 사지로 내몰리고, 실질적인 고용책임이 있는 원청의 책임은 복잡한 하청구조에서 모호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명의 안전이 수시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노동법 2, 3조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차별금지법도 아직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사회가 생명존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오로지 자본의 이윤만이 최고가 되어 있는 사회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가 예외적인 사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생활 차원에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현정부의 국정의 기조까지 그 구조를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탈원전’을 ‘전쟁터의 폭탄’으로 비유하는 국정 최고책임자는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받은 수하들이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인지는 너무나도 뻔합니다. 평온한 일상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사에 대한 문책에서도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건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자기 책임은 빼먹는 이가 국정 최고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최근 공개한 <2022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36위로, 조사대상 146개국 중에서는 59위로 나타났습니다. 경제력 및 문화 발전 수준과는 동떨어진 현실입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연구하다가 묘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자살율과 살인율이 동반하여 급격히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연구결과를『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한국어판 2012)에 담았습니다. 살인율과 자살율이 높은 시기는 보수당 곧 공화당 집권기와 일치하였습니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기기 쉬운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찬미하는 문화를 숭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식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는 ‘의도적 살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결론입니다.
이 진실은 거꾸로 그 불행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유력한 방안이 정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정치체제를 바꾸고 정치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마음을 돌려먹듯 정치인 스스로 바뀐다면 다행입니다. 공감 능력 없는 판사출신 장관, ‘관피아’출신 총리, 검사출신 대통령이 쉽사리 바뀔까요? 바뀌지 않는다면 정치 자체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절망을 극복하는 유력한 방안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절망스러운 상황을 이겨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계에 대한 희망의 절절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향하여 부단히 기도하고 부단히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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