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이 사람으로 마주하는 세계 - 요한계시록 15: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4-28 18:08
조회
175
2024년 4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이 사람으로 마주하는 세계
본문: 요한계시록 15:2~4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역사적 지식’이라는 말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더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객관적인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실재에 대한 해석으로서 그것과 우리와의 의미관계를 따지는 차원이라고 보았습니다. 단지 객관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역시 단지 그 인격을 따르는 차원을 넘어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함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밀스러운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대목은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그 안목이 필요합니다. 다른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물론 상징적 언어로 가득 찬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본문 말씀을 대할 때 늘 환기하지만, 사실 요한계시록은 아주 선명한 진실을 그 요체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으며, 이와 더불어 시작된 말세의 파국과 공포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통치를 확고히 하시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열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지니는 비장한 언어의 성격은 이 서신이 기록된 시점, 곧 주후 1세기 말의 비상한 상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가 그 배경인 것으로 보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dominus et deus)이라 부르라고 할 만큼 광적인 통치자였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가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포한 서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때를 맞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그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진 것이 아니고,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진실을 환기하며 그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나아갈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극심한 박해에 직면하여 비밀스러운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전하는 그 진실이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점진적인 개선으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기존의 질서와 철저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리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지막 파국과 재앙을 눈앞에 두고 앞선 재난으로부터 구출된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사실은 세상의 통치세력을 이겨낸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창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창공에서 짐승과 싸워 이긴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치 모세가 그 백성을 홍해로부터 이끌고 탈출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의롭고 참되신 하나님, 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저 짐승을 이겼다고 하지 않고,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겼다고 했습니다. 짐승은 도저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세상의 권력과 그 통치자를 말합니다. 그 우상과 상징하는 숫자는 그의 통치력이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나타냅니다. 그 통치력이 그만큼 압도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의롭고 참되신 주 하나님, 정의로운 행동으로 사람을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마침내 그 짐승을 이겨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이 눈앞에 가로놓인 홍해를 마주했을 때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마주한 홍해는 자유인의 불가능성을 극적으로 표현으로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로 그 불가능성을 넘어섭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 놀라운 사건을 환기하며, 사람들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짐승의 통치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지배자인 짐승’을 이긴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렇게 되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장한 언어를 대하면서 의문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압도적인 힘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 이 세계 가운데서 우리는 짐승과 같은 통치자 또는 그 우상과 그것을 상징하는 숫자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 세계는 놀랍도록 풍요롭고, 또한 더불어 온 세계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가운데 그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의 세계는 놀랍도록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많은 사람이 하루하루를 마치 전쟁과도 같이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지만, 편견과 증오는 더욱 증가하고, 사람들을 통합하는 정치보다는 편을 갈라 승패를 가르는 적대의 정치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통치자 개인의 스타일도 문제이지만,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람이 엄연히 합법적인 통치자로 행세하도록 보장하는 사회적 기반과 조건이 더 문제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마주하지 못하게 하는 삶의 조건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경쟁의 대상으로, 적대의 대상으로 여겨야 자신이 살아남는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조건이 문제입니다. 짐승과 그 우상,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에 사람들이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전망을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오늘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 교환하고 신뢰를 신뢰와 교환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그대는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극과 격려를 주어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 – 자연 – 에 대한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현실적인 개별적인 삶을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따라 특정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그대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발현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대의 삶을 표현했는데도 이를 통해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전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현자의 말일까요?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의 아름다운 한 대목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사랑으로만, 신뢰를 신뢰로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불가능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선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내가 주는 사랑이, 내가 보내는 신뢰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것을 되묻고 부족한 것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진정성, 나의 신뢰의 진정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도 상호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상대에게 그 충족을 촉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대면관계 차원에서 해결의 한 방법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에 의존합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돈입니다. 돈을 매개하면 거의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실체를 분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돈이 전지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간파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몬>에서 이렇게 간파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노란 노예가 교회도 만들었다 부셨다 하며, 저주받은 자를 축복하며, 문둥병자를 부러워하게 하며, 도둑놈들을 권세 있는 원로들과 함께 모셔놓고 존대하고 굽신거리며 예 예 하게 한다. 시든 과부가 새댁이 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것이다.”

종교개혁 시대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용하도록 투자를 허용하였던 정신은 사라지고, 자본의 증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폴 라파르그는 아예 자본주의를 종교라 말합니다. 그는 <자본이라는 종교>에서 ‘투자자의 기도’를 통해 이렇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거하시는 우리 아버지 자본, 강의 흐름을 바꾸시고, 산에 터널을 뚫으시며, 붙어 있는 해안을 가르시고, 멀리 떨어진 나라를 하나로 융합시키는 전지전능한 분이여! 상품들의 창조자이자 생명의 근원이신 오 그대, 왕과 신민들, 노동자와 고용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여, 부디 그대의 왕국이 이 땅에 영원하기를! 저희 손에서 상품들을 품절할 수 있도록 풍부한 구매자를 주소서! 그리고 그들이 저희 상품이 정품인지 짝퉁인지, 순정품인지 엉터리 제품인지 너무 꼼꼼히 살펴보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투덜거리지 않고 짠 임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난에 찌든 노동자들을 주소서! 설명서의 유혹적인 미끼를 덥석 물고 우리의 엉터리 약속의 그물에 걸려들 얼간이들을 보내주소서! 채무자들이 빚을 다 갚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은행은 우리의 어음을 할인하도록 해주소서! 감방문이 저희에게 열리지 않게 해주시고, 파산을 면케 해주소서! 그리고 항상 배당금이 나오게 해주소서! 아멘.”
금융 자본주의라 일컬어질 만큼 돈이 완벽하게 세계를 장악한 오늘의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통찰입니다.

10년 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직후 한국의 한 언론 <한겨레 21>은 그 현실을 ‘재앙 자본교’라는 이름으로 풍자한 바 있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우리 아버지 자본,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는 재난을 기다리며 돈을 쌓으시고, 가진 자의 안전만을 지켜주시고, 불평등의 극대화를 낳으시고. 오, 전지전능한 분이여!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셈하시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물욕으로 쌓은 아버지의 왕국이여! 아멘.”

너무 적나라하고, 우울한 풍자일까요? 여기에 더해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지표를 더한다면 더 우울해질 수 있기에 그만 자제하겠습니다. 놀랍도록 발전하고 풍요로워진 세계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공통으로 처해 있는 그 압도적인 세계의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분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의롭고 참되신 주 하나님, 정의로운 행동으로 사람을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짐승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그 삶을 향하여 더불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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