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빛 가운데 걸어가자 - 이사야 2: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7-21 16:26
조회
2495
2024년 7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빛 가운데 걸어가자
본문: 이사야 2:1~5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4절은 국제연합(UN) 본부 앞에도 새겨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2:4)
모두가 바라는 이상으로, 오늘 우리에게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더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앞뒤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 점에 우리는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은, 우리가 바라는 그 희망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지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2:2) 그리고 만국의 백성이 이렇게 말하리라고 합니다.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2:3)
이 말씀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의 사명을 말합니다. 선택받은 까닭은 단지 그 존재 자체에 있지 않고 부여받은 과제에 있습니다. 약소민족으로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을 늘 받아야 했던 민족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며 그 위에 군림해 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입니다. ‘봐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너희의 신들을 물리쳤다. 이제 모두 우리 앞에 굴복하라!’ 이렇게 다른 민족들에게 힘을 자랑하며 떵떵거려 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희망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경제력을 강화한다든지 군사력을 강화해서 국위를 떨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움으로 세상의 만백성이 그 길을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다가올 소망의 미래가 분쟁으로 얼룩진 당대 현실과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그 미래를 이루어 가는 방식 또한 당대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이 세상 질서의 진정한 역전, 곧 “칼이 보습으로 되는” 일은 그 방법에서부터 달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칼’은 경쟁과 갈등 그리고 죽음의 파멸을 의미하지만, ‘보습’은 화합과 평화 그리고 살림의 공존을 뜻합니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 완전히 뒤집어져 새로운 법칙이 탄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경 로마제국의 군사 저술가 베게티우스(Vegetius)의 격언입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던 로마제국은 그 격언에 충실했지만,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기에 결국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지배자들은 그 격언을 따라 군사적 우위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 충실합니다. 역사가 입증하듯, 그 결과는 전쟁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전란 극복의 역사가 강조되지만, 사실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평화를 유지한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진정한 평화의 길을 제시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 그 믿음을 따르는 길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정점에 이른 바로 시기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길은 세상이 따르는 길과는 전혀 상반되는 길입니다. 통상적인 가치를 전복해야 가능한 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몇 세기 앞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인식의 전환은 중대한 세계관의 변화를 뜻합니다. 성서가 전하는 말씀의 위대성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사의 변혁에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를 경유하면서 위대한 사상이 분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 말씀은 혼란과 갈등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이뤄진 사상적 전환, 그 전환을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强) 대 강(强)의 논리가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발견한 데 그 통찰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기초가 된 ‘시온주의’는 그 말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대한 전환을 선포하고 있기에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제2의 창조’이자 역사의 완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제2의 창조는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을 뒤집고 전적으로 새로운 법칙으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문 말씀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 다시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한 희망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합니다. “오너라, 야곱의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2:5)

동시대의 예언자 미가 또한 똑같은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진 말씀은 정의로운 평화를 더욱 생생하게 그립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농사꾼 출신 예언자다운 선포입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실을 맛보며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누리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평화의 궁극적 이상은 단지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일체의 폭력과 강요,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과 불안이 사라진 삶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동시대 두 예언자의 선포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군사력에는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그 세계 안에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가자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 일본 홋가이도(北海道)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주말 이틀간(13~14) 정부경 목사와 이상경 목사의 기타미노조미가오카(北見望ヶ丘)교회 취임예배와 주일예배에서 축사와 설교를 맡았고, 남은 시간 몇 군데 둘러보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처음 방문한 홋가이도는 별천지였습니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반 남짓 걸려 삿포로에 도착한 후 기타미(北見)까지 리무진 버스로 5시간가량 가야 했습니다.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몇 시간 달리는 동안 건물도 보이지 않고 수풀과 들판이 쭉 펼쳐지는 풍경이었습니다.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이상경 목사가 반기며 말했습니다. “오신다더니 진짜로 오셨습니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여기서 떠나면 저쪽 러시아입니다.”
도시는 한산했습니다. 그 경계를 벗어나 끝없이 펼쳐지는 풍요로운 농토와 아름다운 풍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장쾌한 풍경이었습니다. ‘이 땅이 이 나라를 먹여 살리겠구나!’ 하는 느낌과 더불어 미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땅을 두고 뭘 더 탐할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홋가이도 ‘개척’이라고 말하는 역사가 있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대략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인 듯합니다.
교회 식구가 경영하는 농장도 방문하고, 쓰루쓰루 온천도 가고, 전망 좋은 비호로토오게(美幌峠)도 올라가고, 키타미시의 선교사 피어선 기념관과 박하박물관도 들러보고, 아사히가와(旭川)에 여장을 풀고 나카후라노(中富良野)의 허브정원과 아름다운 명소로 비에이(美瑛)의 푸른 연못과 폭포를 구경하였습니다. 한사코 방문하자는 곳이 있었습니다. 북단 해안가 아바시리(網走)감옥이었습니다. 먼 길 온 사람을 굳이 감옥으로 인도하는 저의가 뭘까 의심했는데, 둘러보고 나서야 홋가이도를 아는 열쇠가 되는 장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원주민 아이누족의 터전으로 명백히 이방인의 땅이었고, 일본의 공문서에 최초로 ‘식민지’라는 명칭이 적용되었던 홋가이도 ‘개척’의 숨은 사연을 알게 해주는 곳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하여 홋가이도를 개발하는 데 죄수들의 노동력이 동원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891년 4월에서 12월까지 163km에 달하는 도로공사를 하는 데 1,500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고, 그 가운데 200여명이 그 현장에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 도로변에는 3기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고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기왕에 원주민 아이누족의 삶을 파괴한 것에 더해 일본 사회 국외자들을 강제로 동원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일정상 아이누 민속박물관을 들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의 풍요 이면에 뼈아픈 사연을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그 땅에 피와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원주민과 죄수들뿐 아니라 속아 넘어가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조선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폭력적인 제국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홋가이도, 오키나와, 대만에 이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제국주의 폭력의 역사 시발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풍요를 누리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대응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강변하지만, 그러는 동안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을 그대로 체화하였고, 나아가 더욱더 잔인한 제국주의 점령 정책을 펼쳤습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오늘의 역사 수정주의, 평화헌법 개정의 속내는 여전히 과거의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을 보면서 미묘한 생각이 든 것은 그 역사와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음날 18일 오전 ‘채상병 1주기에 즈음한, 윤석열 폭정 종식 촉구 기독교 목회자 1004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하였습니다. 강 대 강의 논리에 기반하여 약자를 희생하고 강자를 부추기는 폭정으로 우리 사회는 병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더 이상 견뎌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3.1 독립선언의 위대한 자주와 평화 정신이 퇴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의 한 대목은 언제 다시 봐도 되새겨야 할 명문이오, 위대한 정신의 유산입니다. 그 정신을 다시 환기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본문 말씀 이사야의 선포와 다르지 않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정신이 우리의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오너라!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그 말씀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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