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25~3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9-08 13:48
조회
535
2024년 9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본문: 마태복음 6:25~34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를 고민에 빠트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한순간도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니, 걱정하는 것도 죄가 되겠다 싶어 마음이 무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마주하면서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to have or to be)를 새삼 떠올렸습니다. 젊은 시절 깊이 감명한 책입니다. ‘소유를 지향하는 삶’과 대비하여 ‘존재를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역설한 책입니다.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삶과 ‘무엇이 될 것인가’/‘어떻게 살 것인가’를 지향하는 삶으로 다시 해석하여 받아들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 책에 나온 하나의 비유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냥 두는 것이 존재를 지향하는 삶이라면, 그것을 기어이 꺾어 자기 방 화병에 꽂아두는 것은 소유를 지향하는 삶이라는 비유입니다. 바닷가의 모래를 그냥 두면 그 모든 것을 누리지만 움켜쥐면 손에서 빠져나가는 이치와 상통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걱정을 버리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렇게 속 편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항상 뭔가를 손에 쥐고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뭔가를 움켜쥐기 위해 매 순간 버둥거려야 하고, 그런 만큼 한순간도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말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그야말로 걱정을 잊으려는 묘안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불자들은 번뇌를 떨치기 위해 고행을 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와 찬양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노래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걱정과 번뇌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냥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대책 없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전에 근원적인 차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람들은 그 근원적 차원을 보지 않고 그냥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만 매여 그것을 일종의 격언처럼 받아들입니다.
근원적 차원, 그것은 생명의 이치, 삶의 이치를 뜻합니다. 본문 말씀의 결론을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그 이치를 알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목가적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입장으로 보아 ‘목가적’이라 여겨지는 것일 뿐 사실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자연과 생활 풍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일깨울 때 일상의 경험을 떠나 어떤 신비한 세계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생활세계와 늘 접하는 풍경을 통해 중요한 진실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익숙한 삶 가운데서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6;26~29) 늘 친숙하게 접하는 자연 현상을 보면서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고도로 발전한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이 자연 현상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은 실로 심각합니다. 예수님 당대 사람들은 그 감각이 훨씬 민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늘 마주하는 현상을 보며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6:30) 이 대목은 예수님의 생활감각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들풀로 불을 지피는 생활방식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한 순간에 불에 타 사라질 들풀 하나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의 새나 땅의 꽃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고 한가한 소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고 들풀보다 귀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인간이 노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나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들풀과 같은 자연물도 살아가는 데 스스로 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말해 무엇하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저마다 생명은 살아가는 합당한 이치가 있는 법이니, 그 진실을 안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학교 다닐 때 한 선생님(한태동)은 그것을 ‘됨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 having or being)라는 물음에 비춰보면 “to be”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인위적으로 부과된 조건에 매여 숙명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부여된 고유한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생각하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든 자연물이 그렇듯이 서로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그 ‘됨됨’ ‘나됨’이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 이치를 의식하지 못한 하늘의 새와 들의 꽃은 제 본성대로 살아가니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 이치를 의식하면서도 어찌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냐,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먹을 게 없어 걱정이 아니요, 세상에 입을 것이 없어 걱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여전히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언어폭력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루도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은 위로와 해방의 선언이 아니라, 그 일상의 구구한 걱정에 더하여 그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죄책감의 부담까지 안겨주는 이중적인 굴레의 선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자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선언하셨을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당대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알지 못하고 말했다면 너무 안일합니다. 그렇다면 전혀 사람들의 현실과 그 마음에 다가갈 수 없는 빈말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 실존 자체에 대한 안일한 이해를 드러내 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현실을 모르고 한가한 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리고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그 현실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당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실상을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그렇게 탄식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6:33)
오늘 말씀은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닦는 수양을 해서 태평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의 삶이 그렇게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그런 걱정만 일삼고 있으면 그 걱정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그 걱정해야 할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할 때 그 걱정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세계에서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자연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깨닫는 감각을 상실해버린 시대에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끊임없는 소유의 욕망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하여, 사람들이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거듭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랫동안 개신교 신앙 전통에서는 자연적인 것이 소홀히 다뤄져 왔습니다. 오래된 자연법 사상, 그리고 이를 적극 수용한 가톨릭에서는 자연적인 것이 깊은 숙고의 대상이 되었지만 개신교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창조된 세계가 파괴되어 하나님의 광채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자연에서 어떤 하나님의 섭리를 추구하는 것은 심지어 우상숭배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개신교 신앙에서 자연적인 것이 제대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의 형태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인의, 구원, 갱신을 지향한다.”(본회퍼, <윤리학>) 본회퍼에 따르면 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경우든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삶이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예시하고 있는 육체적 삶의 권리에는 자의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생식의 권리, 강간, 착취, 고문, 자의적 체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들이 포함되며, 정신적인 삶의 권리에는 판단하는 것, 행동하는 것, 향유하는 것 등이 포함됩니다. 쉽게 말해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죽임’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죽임’에 대항해 ‘살림’의 운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본회퍼가 자연적인 것을 주목하고 자연적인 삶의 권리를 옹호한 것은, 자연적인 것을 타락과 동일시하여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 의미를 복음의 지평에서 회복하려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거스르는 온갖 인위적인 폭력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걱정하게 만드는 온갖 폭력에 대항해 우리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태도입니다.

걱정을 떨치고 사는 것은 그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와 명상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를 따르는 삶을 구현하는 데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이치를 깨닫고 더불어 우리를 걱정하게 만드는 세상의 힘에 맞설 용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안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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