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 미가 6: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10-27 16:03
조회
587
2024년 10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오직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본문: 미가 6:1~8
성경 말씀을 마주할 때, 깊이 헤아려야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직관적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 미가서의 본문 말씀, 특히 그 결론부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6:8)이라는 말씀은 아주 간결 명료합니다.
사실 미가서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명료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 미가의 출신과 삶의 경험, 그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처음 신학에 입문했을 때 아모스서와 미가서를 읽으면서 떨리는 체험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전에 교회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불의를 고발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딱 지금 현실을 두고 하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똑같은 느낌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함께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이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부패, 특히 정치지도자 및 종교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역설한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출신 자체가 미천한 아모스와 미가의 질타는 놀랍습니다. 당대의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가 귀족 출신으로 그 언어 또한 현란하다면, 아모스는 목동 출신으로, 미가는 농사꾼 출신으로 그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통렬합니다. 특별히 미가는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결론에 메시지의 핵심이 담겨 있지만, 일련의 소송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대목(1~2)은 야훼 하나님을 대리하는 예언자가 피고와 증인을 소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산과 언덕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다음 내용(3~5)은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어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당신의 행위를 환기하며 그 뜻을 거스른 백성을 고발합니다. 여기에 피고의 항변(6~7)이 이어집니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느냐 호소합니다. 정성껏 제사를 드리면 되겠느냐 호소합니다. 마지막 대목(8)은 최종 판결에 해당합니다.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것입니다.
최종 판결에 해당하는 선포(8)와 변명거리를 찾고자 하는 피고의 호소(6~7)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피고의 호소에서 백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문합니다. 그 내용은 이른바 종교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떤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를 묻는 물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송아지, 아니면 수천 마리의 양, 또는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 아니면 절박한 상황이라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할지 묻습니다.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물음입니다. 예언자의 선포는 잘못을 범한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피고의 호소는, 잘못을 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잘못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그 물음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물음이 제기한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답이 선포됩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소위 종교적 헌신, 종교적 열정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실천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제의에 충실하고 제물을 드리는 것 이전에 삶의 관계를 온전히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대의 예언자 아모스가 선포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그것은 나아가 모든 예언자가 선포한 메시지의 공통된 핵심입니다. 성서의 가르침,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유난히 다른 점, 바로 그것은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가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선포한 정의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말씀은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착한 일인지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8). 사람이 해야 할 도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피고를 고발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4).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정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백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종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주체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말씀 또한 흥미롭습니다. “모압의 발락 왕이 어떤 음모를 꾸몄으며, 브올의 아들 발람이 발락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를 기억해보아라”(5).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의 행군을 이어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발람을 불러 저주를 내려달라고 했던 이야기입니다(민수 22~23장). 세 차례에 걸친 간청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발락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님께서 꾸짖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수 23:8) 발람은 한없는 은혜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성서에 발람에 대한 전승이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여호 13:22, 신명 23:5~6, 벧후 2:15~16, 계시 2:14), 본래 그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발람은 저주를 거부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이 이야기를 환기하는 것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답게 하나님의 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그 현실에 대한 희망은 본문 말씀에 앞서는 미가의 선포에서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3~4)
나라와 나라들 사이에서 전쟁이 종식되고, 일상의 삶에서 온전한 정의가 이뤄지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을 주목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농사꾼 예언자 미가다운 희망의 선포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땀 흘려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거둔 소출을 바로 그 나무 아래서 누린다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거둔 소출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화스러운 삶이 침해받을 염려도 없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것은 정의의 요체를 함축합니다.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흔히 정의는 물질의 공평한 분배, 곧 분배적 정의로 이해되지만, 특별히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누구나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온전한 관계를 뜻합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은 바로 그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격문을 발표한 날을 기억하여 그 뜻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는 단지 새로운 종교로서 개신교가 탄생했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신앙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종교적·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가장 중심적인 사상의 원리는 사도 바울이 역설했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5:1)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일관되게 선포하고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정의의 원리를 함축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보장하는 모든 자격을 철폐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 소유 여부 또는 능력의 정도와 업적 여부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 대신에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누구에게나 마땅한 삶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놀라운 진실을 환기하며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정신은 폐기되었고 교회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교회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대신 자기의에 기초한 공로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바로 오늘 2024년 10월 27일(일) 14:00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는 그렇게 타락한 교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도회는 100가지 기도 제목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기도 제목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 말은 ‘차별금지법 반대’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보장받는 공평한 세상을 지향하는 법을 반대하자고 200만이 모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런 교회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취지문과 기도문을 보면, 그 기조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성평등의 논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가족주의, 적대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냉전논리의 반복 강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혐오주의, 출산율의 저하를 젊은이들의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며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외면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 뿐 구조적 인식을 결하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심각한 차별주의적 편견을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 모아 도와주자’는 방안 외에 뚜렷한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그 기도 제목들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저하게 각자도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경쟁주의 원리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은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각자가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 나가라고 강요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서 하나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굳이 선의를 헤아려 이해한다면, ‘열심히 사십시오. 교회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도일까요? 선의로 깔아놓은 길이 지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딱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과연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한국교회의 병증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드러내 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생명에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세계 가운데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땅의 유력한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마저 그 불의한 세계와 영합하여 자기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종교적 열정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은혜 가운데 모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보장받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우리로서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교회를 새롭게,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 우리 모두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오직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본문: 미가 6:1~8
성경 말씀을 마주할 때, 깊이 헤아려야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직관적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 미가서의 본문 말씀, 특히 그 결론부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6:8)이라는 말씀은 아주 간결 명료합니다.
사실 미가서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명료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 미가의 출신과 삶의 경험, 그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처음 신학에 입문했을 때 아모스서와 미가서를 읽으면서 떨리는 체험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전에 교회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불의를 고발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딱 지금 현실을 두고 하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똑같은 느낌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함께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이들은 번영을 구가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부패, 특히 정치지도자 및 종교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역설한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출신 자체가 미천한 아모스와 미가의 질타는 놀랍습니다. 당대의 예언자 가운데 이사야가 귀족 출신으로 그 언어 또한 현란하다면, 아모스는 목동 출신으로, 미가는 농사꾼 출신으로 그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통렬합니다. 특별히 미가는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결론에 메시지의 핵심이 담겨 있지만, 일련의 소송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대목(1~2)은 야훼 하나님을 대리하는 예언자가 피고와 증인을 소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산과 언덕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다음 내용(3~5)은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어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당신의 행위를 환기하며 그 뜻을 거스른 백성을 고발합니다. 여기에 피고의 항변(6~7)이 이어집니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느냐 호소합니다. 정성껏 제사를 드리면 되겠느냐 호소합니다. 마지막 대목(8)은 최종 판결에 해당합니다.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것입니다.
최종 판결에 해당하는 선포(8)와 변명거리를 찾고자 하는 피고의 호소(6~7)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피고의 호소에서 백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문합니다. 그 내용은 이른바 종교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떤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를 묻는 물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송아지, 아니면 수천 마리의 양, 또는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 아니면 절박한 상황이라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할지 묻습니다.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물음입니다. 예언자의 선포는 잘못을 범한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피고의 호소는, 잘못을 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잘못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그 물음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물음이 제기한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답이 선포됩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소위 종교적 헌신, 종교적 열정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실천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제의에 충실하고 제물을 드리는 것 이전에 삶의 관계를 온전히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대의 예언자 아모스가 선포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그것은 나아가 모든 예언자가 선포한 메시지의 공통된 핵심입니다. 성서의 가르침,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유난히 다른 점, 바로 그것은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가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선포한 정의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말씀은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착한 일인지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8). 사람이 해야 할 도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피고를 고발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4).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정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백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종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주체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말씀 또한 흥미롭습니다. “모압의 발락 왕이 어떤 음모를 꾸몄으며, 브올의 아들 발람이 발락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를 기억해보아라”(5).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의 행군을 이어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발람을 불러 저주를 내려달라고 했던 이야기입니다(민수 22~23장). 세 차례에 걸친 간청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발락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님께서 꾸짖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수 23:8) 발람은 한없는 은혜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성서에 발람에 대한 전승이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여호 13:22, 신명 23:5~6, 벧후 2:15~16, 계시 2:14), 본래 그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발람은 저주를 거부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이 이야기를 환기하는 것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답게 하나님의 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그 현실에 대한 희망은 본문 말씀에 앞서는 미가의 선포에서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3~4)
나라와 나라들 사이에서 전쟁이 종식되고, 일상의 삶에서 온전한 정의가 이뤄지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을 주목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농사꾼 예언자 미가다운 희망의 선포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땀 흘려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거둔 소출을 바로 그 나무 아래서 누린다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거둔 소출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평화스러운 삶이 침해받을 염려도 없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것은 정의의 요체를 함축합니다.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흔히 정의는 물질의 공평한 분배, 곧 분배적 정의로 이해되지만, 특별히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누구나 마땅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온전한 관계를 뜻합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은 바로 그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격문을 발표한 날을 기억하여 그 뜻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는 단지 새로운 종교로서 개신교가 탄생했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신앙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종교적·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가장 중심적인 사상의 원리는 사도 바울이 역설했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5:1)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일관되게 선포하고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정의의 원리를 함축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보장하는 모든 자격을 철폐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 소유 여부 또는 능력의 정도와 업적 여부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 대신에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누구에게나 마땅한 삶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놀라운 진실을 환기하며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정신은 폐기되었고 교회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교회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대신 자기의에 기초한 공로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바로 오늘 2024년 10월 27일(일) 14:00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는 그렇게 타락한 교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도회는 100가지 기도 제목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기도 제목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 말은 ‘차별금지법 반대’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보장받는 공평한 세상을 지향하는 법을 반대하자고 200만이 모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런 교회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취지문과 기도문을 보면, 그 기조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성평등의 논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가족주의, 적대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냉전논리의 반복 강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혐오주의, 출산율의 저하를 젊은이들의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며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외면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 뿐 구조적 인식을 결하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심각한 차별주의적 편견을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 모아 도와주자’는 방안 외에 뚜렷한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그 기도 제목들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저하게 각자도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경쟁주의 원리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은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각자가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 나가라고 강요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서 하나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굳이 선의를 헤아려 이해한다면, ‘열심히 사십시오. 교회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도일까요? 선의로 깔아놓은 길이 지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딱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과연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한국교회의 병증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드러내 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생명에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세계 가운데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땅의 유력한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마저 그 불의한 세계와 영합하여 자기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종교적 열정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은혜 가운데 모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보장받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우리로서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교회를 새롭게,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 우리 모두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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