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공공선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 - 로마서 13: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11-03 18:58
조회
445
2024년 11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공공선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
본문: 로마서 13:1~7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교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골치 아픈 까닭은 기록된 내용의 문자적 의미가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뜻 그 자체로 보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있는 논지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 말씀이 논란이 된 까닭은, 사도 바울이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중으로 말한 것인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본문은 국가권력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시금석처럼 여겨져, 국가와 교회의 타협 근거이자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 복종의 근거로 인용되어 왔습니다. 한마디로 현 체제와 질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바울이 당대 로마제국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권력체제를 용인하는 근거로 이해된 것입니다. 1970년대 한국의 현대사 가운데서도 본문은 당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의 평소 주장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 전반을 감안하고 볼 때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장이라 골치 아픈 것입니다.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로 인식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든 권세가 굴복했다고 주장한 바울이 느닷없이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전반적으로 종말론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로마서 13장 그 자체의 문맥에 한정해 보더라도 생뚱맞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13:11). 이 말씀은 종말론적 기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의 문맥에서 이렇게 역설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본문은 독립된 구절로서 바울이 직접 쓴 본문이 아니라 누군가 가필한 본문으로 추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본문이 바울의 친필 내용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후대의 가필이라면 어울리지 않는 논조를 간단히 해명할 수 있지만, 바울 자신이 말한 것이라 보기 때문에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과연 무슨 의도로 바울은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을까요? 만일 사도 바울이 국가권력 일반을 염두에 두고 그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주장한 것이라면 바울의 전반적 입장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주장한 것이 분명하다면, 모종의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권고를 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권력 일반론을 전개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황을 유념한 권고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본문 말씀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개념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들은 국가권력, 곧 당시로서는 로마제국 자체를 유념하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권세’ ‘치안관’ ‘통치자’ 등은 제국의 권력기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당국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지방 당국을 지칭한 것은 거대 구조로서 제국의 권력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공권력을 유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 점이 해명되어도 바울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지방 권력이라 해도 제국의 권력과 무관할 수 없기에, 결국 권세에 복종하라는 뜻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는 바울이 어째서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지 문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앞뒤 주장을 헤아리며 깊이 이해하고자 할 때, 이 주장은 우선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제도나 규칙 또는 어떤 질서 그 자체를 곧바로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도와 질서가 보장하는 ‘공공선’에 대한 인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권력 내지는 권력 자체에 대한 논란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심각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까닭은 그것이 민의에 기초하여 공공선(common wealth)을 구현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실체는 공공선입니다. 그 공공선이 구현되는 조건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전반적인 주장을 헤아려 판단할 때 본문 말씀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을 권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공공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도대체 느닷없이 그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사연은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의 특수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은 종종 당국과 시민의 공격 표적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인들의 거센 반로마항쟁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직접 반로마항쟁에 개입되어 있지 않더라도 불온한 무리로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로마 시내에서 유대인들이 일시적으로 추방당한 적도 있었습니다(주후 49~50).
다른 한편 유대인들은 종종 로마제국 내의 다른 주민들로부터도 표적이 되었습니다. 로마당국이 유대인의 특수한 종교적 관습을 용인하여 특히 ‘성전세’ 등을 인정해 준 조치는 다른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특혜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탈세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일반 로마시민들에게도 곱게 보이지 않았고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은 쉽사리 공격당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공격하면서도 동시에 이방인에게 교만하지 말라는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11장), 이 ‘골치 아픈’ 주장의 진의는 공공의 질서를 준수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유대인이지만, 또 상당 부분은 이방인이었던 만큼 그 이방인들은 일반적인 이방인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 주장은 그들이 공공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골치 아픈’ 이 본문은 결코 제국의 질서에 맹목적으로 봉사하라는 주장이 아니라 제국의 질서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판단에서 나온 특별한 권고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에서 유념한 것은 무질서와 혼란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이 일반적으로 권고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일상의 공공성을 지킴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전제는 현실의 모든 권세를 정당화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권세가 정당성을 갖기 위한 기본 전제조건이 됩니다. 본문 말씀은 악하든 선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주어진 세상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곡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세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권세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악한 권력에 대해 미처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헤아릴 때 그 뜻이 모든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곡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라”(12:17)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본문 말씀에 곧바로 이어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역설합니다(13:8). 바울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희망의 근거로 사랑을 역설합니다. 이어서 구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13:11). 그러니까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본문 말씀은 그 전후 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대의에 비추어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대의를 구체화하는 방편으로서 공공의 질서를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벗어난 권세가 그 자체로 결코 정당성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2천 년에 걸쳐 본문 말씀이 곡해되고 오용되는 가운데서도 그 말씀의 진의를 제대로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934년 독일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바르멘 신학 선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 14: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요한 10:1,9)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것과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또한 제2의 바르멘 선언이라 일컬어지는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 선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현재의 한국의 독재정치는 법과 설득에 의한 통치를 파괴하고 있으며, 현재는 폭력과 위협만으로 통치하고 있다. 사회는 정글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이외에는 법을 초월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권력이란 하나님이 정의와 질서를 인간사회에 유지하려고 권력자에게 위탁한 것이다. 누구든지 법을 초월하고 신이 위탁한 정의를 배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는 어떨까요? 적나라한 실상을 거듭 말하지 않겠습니다. 옛 현인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 현실을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다음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친하게 여겨 칭송하고, 그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가장 나쁜 통치자는 그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道德經 17장).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떤 경우일까요?

본문 말씀은 공공선을 이루는 데 협력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공적 책임을 일깨울지언정, 권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의를 제대로 새긴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 안에서 공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결단하고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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